신뢰(信賴)가 힘이다_김수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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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信賴)가 힘이다

< 김수연 목사, 서부제일교회 >

 

신뢰성은 마음의 거리이며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안에 평안 있어

 

 

개인공간(Personal-space)이란 심리학에서 인간 혹은 물건과의 사이의 사람이 두는 거리를 말한다. 

이 개인공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싼 공간 중에서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는 범위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 공간을 네 종류로(네 단계) 구별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단계를 밀접거리라고 한다. 아주 가까운 거리, 마치 연인의 관계처럼 서로 사랑하고 밀착된 그런 마음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신뢰가 있고 참된 평안이 있다.

둘째 단계를 개인(체)거리라 한다. 개인거리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이다. 내가 마음을 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런데 열지 않는다. 한 평생 같이 살지마는 아직 믿을 수가 없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세 번째 단계가 사회(교)거리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많은 사람과 만나야 한다. 필요에 의해서, 사업상 또는 여러 이유로 만나며 산다. 함께 만나는 것 같지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교적으로 필요에 따라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거리다.

네 번째 단계가 공중거리이다. 공간적으로는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은 전혀 멀리 있다.

내가 남을 얼마나 믿으며, 믿을 수 있으며, 저는 나를 얼마나 믿어 준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신뢰성이라는 것이다. 신뢰성은 마음의 거리이다. 온전히 믿으면, 혹은 나 자신처럼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고 사랑이다. 여기에 평안이 있다.

요즘 우리의 사회를 보면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신뢰가 무너졌다. 위정자들과 국민의 관계에서 신뢰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부간에도 신뢰에 위기가 감도는 시대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신뢰가 흔들린다. 친구끼리도 믿지 못하고, 교회끼리도 믿지 못한다. 목회자와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불행이다. 여기서는 재미가 없고, 평안이 없다.

믿을 때 평안하고 믿을 때 자유함이 있다. 그리고 신뢰할 때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된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알고도 믿음이 없다면 소용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믿지 못하면 생명이 없다. 능력이 될 수 없다. 믿을 때 지혜가 되고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이다. 신뢰할 때 힘이 된다.

지금 세계는 정치적인 힘, 경제적인 힘, 문화적인 힘으로 주도하고 지배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힘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신뢰성에 있다. 신뢰성을 가질 때 거기서 진정한 힘이 나온다.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이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이 있고,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장성하자 짝을 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인이 될 사람을 가나안 땅에서 찾지 않고 고향에서 며느리를 구하려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그의 종 엘리에셀을 보내어 사람을 찾게 한다.

한 집안의 며느리를 들이는 일은 너무나 중차대한 일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큰 일이다. 때문에 이 일은 당사자들인 부모가 직접 나서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을 종에게 맡긴다. 그리고 종은 이 일을 맡아 길을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종 엘리에셀 사이에 얼마나 큰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에 대한 절대 충성과 신뢰를 통해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신뢰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진정한 신뢰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신앙(信仰)이 사람도 신뢰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엘리에셀도 마찬가지다. 그도 하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렇다. 신뢰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중심을 가질 때 그때 우리는 온전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에, 내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믿기에, 세상이 어떠하더라도, 사람이 어떠하더라도 나는 신뢰할 수 있고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진정한 신뢰는 사랑(愛)에서 발휘된다.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은 주종관계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종을 사랑했고, 종은 주인을 사랑했다. 여기서 사랑이란 가족과 같이 친구와 같이 생각하며,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그를 가족과 같이 생각했다. 그러기에 한 집안의 며느리를 선택하는 일, 아들의 부인을 선택하는 막중한 일을 맡긴 것이다. 또한 엘리에셀 역시 그 일을 위임받아 주인의 뜻을 존중하며 나간다.

이 둘의 관계가 얼마나 사랑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종에게 권한을 주고, 종은 주인을 존중하고 그 뜻을 온전히 따른다. 이게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위로는 존중, 존경이며, 아래로는 긍휼이요, 수평적으로는 우의, 나눔,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신뢰는 성실(誠實)함에서 나온다. 엘리에셀은 참으로 성실한 종이었다. 진실한 종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했다. 그리고 아브라함 형제의 집을 찾아 아브라함의 뜻을 그대로 전한다. 더하지도 감하지도 않는다. 아브라함이 그를 보낼 때 많은 보화를 주었다. 그것에 대해 사심이 없다. 깨끗이 받은바 대로 전한다. 신뢰를 이루는 또 하나의 힘은 바로 성실함, 진실함인 것이다.

주님은 일찍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다’(눅 16:10)고 하셨다. 충성이란 주어진 일에 순종하며 성실한 것이다. 작은 것에 성실한 자는 큰 것에 성실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신뢰가 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시급성은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뢰가 진정한 힘이기에 말이다. 성실을 식물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