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劍)’의 권세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통치_장대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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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劍)’의 권세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통치

< 장대선 목사, 가마산 교회 >

방종하는 자들을 치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권력을 위임해 주신 것

 

 

현대사회에서는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와 정부 혹은 사회의 문제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구별은 단순히 행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의식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뿌리깊이 갈라져 있어서 일반적인 신앙으로는 이를 바르게 의식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하다보니 그러한 구별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교집합(交集合)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를 가히 이슬람(Islam)과 같은 신정국가를 지향하는가 하는 의심을 받기 십상이다.

프랑스 신앙고백(1559년) 제35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방종과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굴레와 같은 것을 두셔서 법과 정치를 통해 이 세상이 다스림을 받는 것을 원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세습 혹은 여타의 방법에 의해 군주국, 공화국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종류와 형태의 국가와 정체(政體)들을 세우셔서,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것들의 설립자로서 인정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고백이 이어지고 있어서,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여타의 어떤 세속의 권위나 정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세속권세에 대한 이해와 고백은 1647년에 공표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동일하게 고백되고 있다. 제23장 국가 공직자에 대한 주제 제1항에서 “온 세상의 지고하신 왕이요, 주님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해 자기 아래 국가 공직자들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 분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들에게 칼의 권세를 허락하시어 선한 자들은 보호하고 격려하며, 악인들은 징벌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들은 사회적 합의나 종교회의에서 토론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의 권위 가운데서만 도출된 것이니, 이에 따라 신앙고백서들은 동일하게 성경 증거구절들을 첨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러한 신앙의 고백 가운데서 세속의 군주 혹은 의회는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논의된 결과를 공적으로 공표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와 성경이 교훈하는 바에 따라, 교회와 정부(혹은 국가)는 각각 별개의 집합들이 아니라 각각 양립하는 교집합으로서 세상에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성경을 통해 두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세속정부와 교회정치에 있어서 각각의 권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세속정체나 교회정체나 공히 권세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한 모범을 가장 잘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장로교회의 정체(政體)인데,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성경의 진리보다 위에 설 수 없고, 누구라도 성경의 진리 외에 그 어떤 속박이나 지배도 받지 않는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으로서의 정치체계다.

따라서 이런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세속정부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곧 세속군주나 관원들에게 칼이 주어지는 것은 백성들의 악을 징벌하는 도구로써 주어진 것이지, 군주나 관원이 군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원리에 따라 교회에 누군가가 머리의 권세를 차지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앉을 수 없는 권세를 차지하는 지극히 큰 패역이다. 곧 목사나 장로, 집사나 그 어떤 신자라도 교회에서 권세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원리에 따라 국가에 누군가가 머리의 권세를 차지하는 것은 그를 도구로 세우신 하나님의 권세를 찬탈하는 것이며, 인간인 자신의 자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지극히 큰 죄악이다. 곧 왕이나 원로, 관원이나 의원 등 그 어떤 자라도 백성들의 악을 징벌하는 기능 외에 그 어떤 위해나 속박을 가해 권세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독재자는 세속사회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극악한 죄인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회나 국가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회나 국가라도 독재의 자리에서 군림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죄인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도구로써 합당한 교회와 국가의 모습은, 성경의 진리 외에 누구도 권세 가운데 있지 않는 교회의 설교자들과, 백성들의 악을 벌하는 역할 외에 그 어떤 위세나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국가의 위정자들이 함께 참된 신앙과 삶을 치리(治理)하는 의미에서의 신정국가이다.

그러한 국가관과 그러한 교회관은 먼 이상(理想)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요 목적이니, 멀리서 관망할 것이 아니라 멈추지 말고 부지런한 걸음을 더해가야 하는 것이다.

또 한편, 그러한 통치와 치리는 결코 방종을 위한 명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대적하고 거스르며,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화인 맞은 양심으로 방종하는 자들을 치리하고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장로들과 국가의 관원들에게 각각 권징과 권력을 위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단히 주인을 거스르는 종이나 자유로 법을 거스르는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서의 채찍과 법치가 내려지는 것이며, 고의로 죄를 범하며 진리를 거스르는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에게도 권징이 시행되는 것이다.

비록 교회나 국가나 온통 권세자들이 우글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된 모습은 하나님의 진리와 통치만이 자리하는 진정한 장로주의교회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아울러 분명한 것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롬 13:1-4)는 말씀처럼 선하지 않음에 권세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