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68_사선에 선 목회자: 신교의 골리앗, 쥐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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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68

사선에 선 목회자: 신교의 골리앗, 쥐리외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삐에르 쥐리외(Pier re Ju r ieu, 1637~1713)는 블루와(Blois) 교구 메르(Mer)의 위그노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파리 샤릉똥 교회의 초대 목사였던 삐에르 뒤물랑 (Pierre du Moulin, 1568~1658)의 딸이다. 쥐리외는 소뮈르(Saumur)와 스당(Sedan)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을 여행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목회를 이어받았다. 1674 년, 쥐리외는 학문성에 높은 평판을 받아 스당신학교에서 신학 과목과 히브 리어 과목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개혁파 신앙을 고수하는 신자들의 신앙 변호』(1675)와 『교회의 권세에 관한 논문』(1677)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1681년에 루이 14세가 스당 신학교를 폐교시키자, 쥐리외는 루앙(Rouen)으로 가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로테르담(Rotterdam)으로 피신했다. 그는 거기에서 왈롱파(네 덜란드에 거주하지만 프랑스어를 말하는 신교 신자들) 교회의 목사가 되어 종신토록 목회했고, 에꼴 일뤼스트르 (École Illustre)의 신학 교수로 활동했 다. 여기에서 그는 『칼빈주의와 교황주 의의 비교 역사』(1683)를 출판했다.


1685년에 루이 14세가 낭뜨 칙령을 철회하자, 쥐리외는 『혹독한 신교 박해에 대한 몇 가지 견해』(1685)를 발표 했고, 바빌론 포로처럼 참혹한 고난을 겪는 신자들에게 『난민 수용국 네덜 란드에서 프랑스에 보내는 목회서신』 (Lettres pastorales)을 써서 보냈다 (전 3권, Rotterdam, 1686~1687; 영역 1689). 이 편지는 프랑스에서 비밀 리에 유포되었고 전 유럽에서 널리 읽혔다. 그의 목회서신은 종교와 정치라는 양면의 시각에서 저술되었다. 쥐리 외는 목회서신에서 루이 14세가 낭뜨칙령을 철회한 퐁텐블로 칙령(1685)의 합법성을 공격하고 절대왕정에 반대 하면서 군주와 국민 사이의 계약을 주장하는 사회계약론을 전개했다. 이것은 후일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사회계약론』(1762년)을 발표하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논쟁적인 성격 때문에 큰 손상을 입었다. 특히 가톨릭 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펼쳐 논적들로부터 “신교의 골리앗”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쥐리외는 처음부터 국민의 주권을 신뢰했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를 변호했 다. 그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치에 반대하면서, 빌럼 오라녜 3세의 ‘명예 혁명’(1688-1689)을 ‘우리 시대의 최대 사건’이라고 부를 정도로 뜨겁게 지지했다. 전제주의와 왕권신수설의 정당성에 공개적으로 회의를 표명한 것이다. 1690년대에 이르러 쥐리외는 프랑스에 정보원 연락망을 조직했다. 로테르담에 기반을 둔 이 조직은 프랑스 전역의 주요 도시에 정보원을 심어 놓고는 암호문으로 정보를 입수했는 데, 많은 위그노들과 빌럼 오라녜 3세 에게 후원을 받았다. 같은 시점에 로테르담에서 난민 생활을 했던 위그노 신학자 삐에르 벨르(Pierre Bayle, 1647~1706)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쥐리외의 사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벨르는 루이 14세의 권력이 전제주의 횡포 임에도 불구하고 군주제를 충실하게 수용하였다. 쥐리외의 열정은 벨르 같은 목회자들과 적의에 찬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상대방이 학문과 경건에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과 견해가 다를 때는 지나치게 신랄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쥐리외는 고난 가운데 있는 위그노 들을 격려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주석했는데, 예언 해석에서 너무 상상력
쥐리외, 구글 자료에 빠져드는 오류를 저질렀다. 쥐리외는 “예언의 성취”(1686)라는 글에서 1689년에 적그리스도 교황이 패망하고 신교가 다시 프랑스에 확립될 것을 예언하였다. 같은 방식으로 쥐리외는 교회 정치에서도 신자의 주권 사상을 변호했다. 이런 이유로 쥐리외는 루이 14세의 탄압에 저항하는 남프랑스의 까미자르(Camisard) 전쟁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평민 예언자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여러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적인 삶에서 목사의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성심껏 돕는 삶을 살았고, 여러 나라에서 난민으로 고난받는 위그노 신자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널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쥐리외는 1713년 1월 11일에 네덜란드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