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인물: 믿음을 그린 화가 라부쉐르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삐에르-엉뚜완느 라부쉐르(Pierre-Antoine Labouchère, 1807-1873)의 가문은 18세기 초엽 믿음을 지키기 위해 네덜란드로 이주한 위그노 신자들이었다. 선박회사를 운영하는 그의 부친은 낭뜨에 영사로 와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라부쉐르는 1807년 11월 26일 바로 여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영국과 독일로 사업과 경영을 공부하러 갔다. 그의 부친이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는 은행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라부쉐르는 은행의 전출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무를 보았고, 스물다섯 살에는 중국에 가서 본사를 낭뜨에 두고 있는 형의 선박에서 화물 관리자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주요 관심사로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마침내 1836년에 라부쉐르는 잘나가던 일자리를 모두 접은 다음 일 년 동안 그림 공부를 하러 로마에 가서 장차 평생의 스승이 될 뽈 들라로쉬(Paul Delaroche)를 만났고, 한 해 뒤에 파리로 돌아와 그의 문하에서 회화 수업을 계속하였다. 1839년 5월 23일, 그는 나딸리 말레와 결혼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직물 인쇄의 대명사로 통하는 “쥐앙조사”(Jouy-en-Josas) 제조사의 창업자인 독일계 프랑스인 오버감프였고, 모친은 은행업 가문 출신인데 프랑스 유치원의 창시자로 이름을 날린 에밀리였다. 라부쉐르 부부는 알프레드와 쟌느-에밀리를 낳았다. 결혼 후에 라부쉐르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많은 수채화를 그렸다. 1846년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의 대사로 봉직하던 사촌을 따라 알제리와 스페인을 다니면서 공식적인 해외 원정 화가로 활동하였다.
1843년과 1870년 사이에 라부쉐르는 거의 매년 파리 살롱의 전시회에 작품을 제출했다. 그는 가문의 위그노 신앙에 깊이 영향을 받아 믿음을 독실하게 견지하였기 때문에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그림의 소재를 많이 얻어냈는데, 언제나 세심하게 역사를 연구한 끝에 작업을 시작하였다. 라부쉐르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1843년에는 “올리브 나무 아래 앉은 오말 공작”이라는 그림으로 살롱에서 3등을 수상하였고, 1846년에는 “성경을 번역하는 루터, 멜란히톤, 포메라뉘, 크뤼시제”라는 그림으로 2등 상을 받았다.
파리 살롱에 전시했던 많은 그림 가운데 세 그림이 남프랑스 미알레에 자리 잡고 있는 위그노 “광야 박물관”(Musée du Désert)에 걸려있다. “보름스 제국회의 앞에 선 루터” 그림은 152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5세를 향해 진리를 갈파하는 루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까미자르 지휘관 쟝 까발리에” 그림은 농민이 주축이 된 민병대를 이끌고 국왕 루이 14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던 까발리에의 모습을 묘사한다. 또한 여기에는 “어린 아들 옆에서 기도하는 작센 선제후 부부”의 그림이 있다. 이 외에도 라부쉐르는 루터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고, 제네바 신학자 도비녜가 저술한 “루터의 생애”에 삽화를 그려 넣었다. 이후에 여러 사람이 유명세를 탄 라부쉐르의 작품을 모사하였다.
라부쉐르는 평생토록 많은 서적과 유명한 인물들의 육필을 수집하였다. 그 가운데는 다빈치의 원고, 모차르트의 편지(1783년 5월 3일 비엔나에서 부친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 베토벤의 육필 악보, 베를리오즈의 편지, 하이든의 심포니 악보, 로시니가 서명한 악보 등이 있다. 독실한 신자였던 라부쉐르는 위그노의 역사를 총괄적으로 연구하는 “프랑스 신교 역사 협회”(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의 회원으로 힘껏 활동을 펼치면서 여러 논문을 기고하였고, 사망하기 직전에 자신이 수집한 장서와 육필을 협회에 기증하였다. 라부쉐르가 협회에 기증한 물품 가운데는 라로쉘 야영지에서 위그노 군대에 자신의 아들을 소개하는 위그노의 정치적 총수 쟌느 달브레(Jeanne d’Albret) 여왕의 그림도 있다. 그의 나머지 장서와 육필 수집품은 그의 출생지인 낭뜨의 공립도서관에 유증되었다.
라부쉐르는 1873년 3월 28일에 파리에서 사망하였고, “페르 라셰즈 공원묘지”에 있는 오버캄프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39번 구역). 낭뜨에 그를 기념하는 “라부쉐르 길”(Rue Labouchère)이 있다.
[라부쉐르. fr.wikipedia.org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