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 교수에게 듣는 부활절과 신학-장세훈 교수 김추성 교수 이남규 교수 박상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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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신 교수에게 듣는 부활절과 신학

 

하나님의 신원하심과 부활의 승리: 다니엘서의 부활사상

▶구약신학 ● 장세훈 교수

다니엘서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이야기로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가 부활 사상을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그다지 많이 강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니엘서는 성경의 다른 어떤 본문들보다도 장차 이루어질 성도의 부활 사상에 대한 풍성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다니엘서의 부활의 내용은 ‘하나님의 신원하 심’이라는 핵심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 다. 이 주제와 부활 사상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니엘서 전체 구조를 간략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전반부(1-6장) 와 다니엘의 묵시적 종말 사상을 전달하는 후반 부(7-12장)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다니엘서의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동일하게 고난받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다스림과 신원하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과 친구들의 삶을 다루는 전반부는 무엇을 강조할까요? 다니엘과 친구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때문에 당하는 숱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 오직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그역경을 이겨내며 승리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경험합니다. 특히 우리는 전반부 에서 풀무 불이나 사자 굴과 같은 죽음의 위험에 처한 다니엘과 친구들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신원하심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높이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종말의 시대에 이들처럼 고난에 직면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고대하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서 예고하듯이 분명 종말의 시대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니엘처럼 핍박을 경험할 것이며,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장과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잔혹한 핍박은 종말의 적그리스도의 공격과 위협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음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님을 강력히 선언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살려주신 하나님은 악한 세력의 핍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종말의 성도들을 다시 그 죽음에서 살리시어 신원해 주실 것입니 다. 그래서 다니엘은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12:2)이고 선언합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고 따르는 신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 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난 받는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신원하심이 우리의 삶을 회복으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땅에서 회복과 승리는 단지 종말에 주어질 부활의 영광과 그 승리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누리는 영생의 기쁨에 머무르지 말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루실 종말의 회복을 더욱 고대하며, 그 회복이 성도들의 영광스 러운 부활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라!

▶신약신학 ● 김추성 교수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1).
어지럽고 혼란한 시국 가운데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찾아왔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온 교회와 가정 위에 넘치시기를 소망합니 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하며 신천지라고 불리는 사이비 신흥종교 집단이 한동안 화제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신천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신천지의 사악한 정체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신천지는 문자 그대로 새 하늘과새 땅을 뜻합니다. 사이비 신흥종교집단이 이용어를 사용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천 지라는 용어를 교회에서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 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사실상 성경의 최고 계시요, 계시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새 하늘과새 땅이야 말로 복음 중의 복음이요, 그리스도 인들의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를 사이비 신흥종교가 도적질해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비판 일변도로만 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속도로 부흥하면서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한 메시지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웰빙(Wellbeing), 번영, 행복, 그리고 성공의 메시지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범람하지 않았는지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메시지는 비현실적인 메시지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우리의 삶과 별로 관계없는 것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천국의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도 이제는 적지 않아 보입니다. 합리주의와 비평주 의가 신학계 전반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내세를 믿는 종교이며 내세 중심적인 종교입니다. 내세 중심이라는 것은 신학 사고체계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입이다. 그리스 도인들은 현실도피적이 되어서도 안되나 현세 중심적이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이 땅의 외국인과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이 땅이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는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영원한 나라, 영원한 본향을 목표로 고달픈 현실을 감내했습니다(히 11:16). 칼빈은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이 땅은 잠시 머물다 가는 유배지요 공동묘지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속한 모든 영광을 경멸하며 발로 짓밟아 버리라고 말합니다. 30대 중반부터 세상 떠나기까지 그는 아버지께 천국으로 불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칼빈의 천국 사모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누구보다도 사모했고 그 소망에 사로잡혀 종교개혁의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종종 한국 기독교가 내세만 강조하다가 현세를 무시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초창기에 미성숙해서 그런 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믿음으로 순교했습니다. 죽으면 주님 곁으로 갈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확실한 믿음 으로 고문을 견뎌내고 온갖 핍박을 견뎌냈습니 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러했고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그런 믿음으로 생명을 초개와 버렸습니 다. 그런데, 오늘날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천국의 초월적 실제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신약학자 N. T. Wright는 죽어서 천국간다고 믿는 것은 비성경적인 견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을 강조하다가 장소성을 거 부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균형을 잃은 해석입니다. 지금 이 땅이 변하여 천국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호와증인의 천국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오류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는 면도 있으나 우리가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인 동시에 장소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동시에 성도들의 영원한 거주지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 다. 세상의 모든 소망이 끊어진다고 하여도 성도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위대한 복음전도자 무디도 자녀를 여러 명 잃고 나서야 비로소그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사모합시다. 그리고 그 나라를 준비하 십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도다”(벧후 3:12-1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복음의 중심인 부활의 역사성

▶조직신학 ● 이남규 교수

성경은 부활의 역사성을 충분히 증거하고 역사성을 부인하려는 모든 시도와 싸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 에게와 그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 나니 그 중에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고전 15:3-5).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역사이 역사적 사실이듯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 역사적 부활이란 영적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 이다. 죽으심, 장사되심, 부활하심, 그리고 그후에 부활한 모습을 보이심이 뒤 따르면서 부활을 확증한다. 삼일이라는 시간과 ‘빈 무덤’이 말하는 바(마 28:1-7)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영적 부활이 아니라 육체적인 역사적 부활이라는 사실 이다(눅 24:36-43, 행 1:3). 예수님은 자신이 영 (ghost)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부활한 살아있는 사람임을 강조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40).
역사적인 육체의 부활은 복음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살아나심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고전 15:1)의 핵심이며, 이것은 “내가 받은 것”으로서 “내가 전한 그 말을”(고전 15:2)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은 전파하는 것의 핵심이다(고전 15:14). “그리 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 며”(고전 15:14).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이 복음을 이룬다(고전 15:3).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다. 죄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히 2:11).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우리 죄를 위하여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지니신 자가 되었다(히 2:11). 부활은 인성을 취하사 행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증거한다. 그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갈 4:4-5)하시기 위함이었는데, 성취하셨 다. 과연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으며(마 5:17)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승천 또한 동일한 것을 증거한다. 부활로 인하여 그의 인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혈과 육을 지니신 자가 하늘로 오르셨다. 하늘에 있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 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 답서는 우리의 혈육을 지닌 자가 하늘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늘에 우리의 육체가 있다”(49 문)고 고백한다. 우리는 육체까지 하늘에 합당한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하늘에 있다고 했을 때(엡 2:6), 단지 우리의 신분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일지라도 우리와 혈육이며 우리를 대신 하시기 위해 생명을 버리신 우리의 보증이신 이가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셨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 라”(히 6:20).
그러므로 부활은 과거의 기적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현재에 직결된다. 우리와 같은 혈육을 지니셨던 자, 고난과 죽음을 겪으시사 우리의 고통과 죽음의 비참함을 아시는 분이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은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히 4:16).
예수님께서 우리의 혈과 육을 취하사 우리 죄를 대신하여 우리가 가야 했을 영원한 치욕의 길을 가셨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 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 이의 길을 따라 간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부활은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공급받는 능력의 근거이며 우리 부활의 보증이다. 하나님께 서는 부활을 의심거리로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믿음의 증거로 주셨다. “그를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행 17:31).

 

로마가톨릭교회와 구별되는 개신교의 부활절 기념: 깔뱅과 청교도를 중심으로

▶역사신학 ● 박상봉 교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타락을 주목하면서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절기들에 대해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거절하는 입장을 취했다. 성경적 근거가 있는 예수 그리스 도의 대속사역과 관련된 성탄절, 부활절, 성령 강림절, 승천절 같은 절기는 인정했지만, 그밖에 로마가톨릭교회가 인간의 공로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모든 절기는 폐지시켰다.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와 멀어진 로마가톨릭 교회의 절기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것이 다. 모든 신앙적 실천의 근거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두길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인정된 절기도 모든 미신적 이거나 허식적인 요소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절기를 특별한 행사로 기념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여겼다. 다만, 주일 예배 때 각 절기와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특별히, 부활절 기념과 관련하여 장 깔뱅 (Jean Calvin)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화려한 의식을 모두 금지시켰다. 즉, 부활절을 축제처럼 기념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 대신에, 진지 하고 경건하게 드려지는 주일 예배 안에서 부활에 대한 성경 본문을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되새기고, 그 부활의 신학적 의미를잘 설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깔뱅은 성찬식을 자주 드리길 원했지만 당시 현실적 상황 때문에 취리히 교회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절기들과 연계하여 1 년에 4번 정도 시행했다. 당연히, 그중에 한 번이 부활절이었다. 깔뱅은 여느 주일과 동일하게 부활절을 기념하면서도, 매 주일이 부활을 기념 하는 날이라는 사실도 강조했다. 주일 자체를 부활절과 같은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매 주일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 쳤다. 물론, 주님의 구속사역과 관련된 다른 절기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했다.
깔뱅은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보았다. 로마서 4장 25 절을 근거로 주님의 부활은 과거 사건이 아니라, 신자의 칭의에 대한 보증임을 강조했다. “그리 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살아나셨다. 이는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제거되었으며, 부활로 말미암아 의가 다시 살아났으며 회복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Inst. 2.16.13.).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 면,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한데,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약속한다고 했다. “복 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는 공의로운 해로서 바울이 증언하듯이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하셨다.”(Inst. 3.25.1.). 주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모든 신자가 마지막 심판 날에 부활할 것을 확신할 수있다고 밝혔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취하신 본성으로 모든 삶의 여정을 다 마치시고 불멸성을 획득하셔서 앞으로 우리에게 있을 부활의 보증이 되신다.”(Inst. 3.25.3.).
칼뱅의 부활절 이해는 이후 청교도들에게 큰영향을 미쳤다. 주일 자체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을 주목하여 청교도들은 부활절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자연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교적 축제와 연계되어 기독교의 부활절 절기가 시작되 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의 잔재로도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는데,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부활절, 우리의 승천절, 우리의 성령강림절은 매 주일이다.”청교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지만, 그러나 특정한 날을 부활절로 기념하여 지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매 주일을 ‘주님의 날’(The Lord’s Day)로 여기고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길 원했다. 실제로, 17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미국) 청교도 들은 다른 절기와 함께 부활절을 공식적으로 기념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부활절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널리 지켜지기 시작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깔뱅과 청교도들의 부활절 이해는 역사적으로 장로교회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부활절을 화려하게 기념하기보다 경건한 방식으로 보내는 전통을 확립시켰다. 이에 따라서 장로교회는 부활절을 지키는 방식에 있어서 성경적 근거를 중요하게 여기고, 지나친 의식주 의를 경계한다. 그리고 절기 자체의 행사에 집중하기보다 예배 때 말씀 선포를 통해서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을 의미 있게 여긴다. 끝으로, 부활 신앙을 일상의 삶과 분리하지 않고, 모든 삶속에서 우리에게 부활의 은혜를 값없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한국 장로교회의 부활절 기념도 이와 다르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