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노르망디 디에프 출신 위그노 살로몽 드꼬스(Salomon de Caus, 1576-1626)는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만능 과학자였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드꼬스는 인간의 지식을 망라하겠다는 듯이 미술, 고전 어, 역학, 기계공학, 건축, 수학, 음악 등을 공부하였고,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지식을 완성하는 데 도전 하였다. 많은 학업과 연구 끝에 높은 학문의 경지에 도달하자 정작 주로 활동한 무대는 프랑스가 아니라 벨기에, 영국, 독일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였다.
1610년 말 쯤, 드꼬스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만난 왕실 후원자는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왕비 덴마크의 앤과 그녀의 아들 헨리 왕자와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그에게는 “왕비의 정원사”라는 명칭이 주어 졌다. 드꼬스는 런던에서 하드필드 하우스의 동편 정원에 분수를 설계 하는 데 이어, 그리니치 궁전/플라센 시아 궁전을 꾸몄고, 서머셋 하우스 에는 조류 사육장을 설계하였다. 그외에도 덴마크 하우스와 리치몬드 궁정의 정원 설계를 맡았다.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드꼬스에게 답례로 상당한 금액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드꼬스는 1614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통치하는 독일 하이델베르 크로 건너갔다. 1612년 영국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제임스 1세의 딸 엘리 자베스와 결혼한 프리드리히는 왕궁 에서 드꼬스를 만났다. 선제후는 결혼 후에 먼저 하이델베르크로 돌아 가서 뒤따라오는 왕비를 위해 당시 성행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로 새로운 정원을 세웠다. 다름 아니라 저 유명한 “호르투스 팔라티누
스”(Hortus Palatinus 팔라틴 정원)이다. 엘리자베스 왕비의 가정교 사였던 드꼬스는 614년 7월부터 정원을 신설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악조건으로 손꼽히는 하이델베르크의 전형적인 산지 경사를 과감하게 활용하여 다층의 테라스를 만들어냈 다. 짙은 숲으로 둘러싼 정원에 꽃과 나무 같은 다양한 식물을 심고, 오렌지 과수원을 만들고, 주상을 세우 며, 예술 동굴을 설치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수력으로 작동되는 시계가새 울음소리를 내는 경이로운 장면을 보면서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 의”라고 불렀다.
이때 쯤 드 꼬 스 는 “ 동 력의 원인”(1615년)을 출판했다. 여기에서 증기로 작동되는 펌프를 소개한다.
그는 증기의 팽창과 압축 이론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증기 동력의 실용화에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런 이유로 드꼬스는 한때 증기기관의 발명가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증기기관 연구의 괄목할만한 업적을 보기까 지는 두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분야를 완벽하게 계승한 사람은 드꼬스처럼 위그노 신앙을 견지했던 천재 과학자 드니 빠빵(Denis Papin, 1647-1712) 이다.
드꼬스는 하이델베르크 정원을 만들기 위해 5년이라는 세월을 이어갔 지만, 30년 전쟁(1618-1648)이 터지 면서 모든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620년, 전쟁에서 패배한 프리 드리히 5세가 네덜란드로 피신을 떠나는 바람에 드꼬스도 지위를 상실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토록 공을 들였던 정원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델베르크를 공성하면서 약탈을 자행한 프랑스 군대에 의해 철저 하게 파괴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드꼬스는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투자한 오랜 외유를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때는 루이 13세가 통치 하고 있던 1621년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드꼬스는 루이 13세의 궁정 건축가와 공학자가 되었다. 1624년에 당시의 재상 리슐 리외 추기경에게 헌정한 책에서 센느 강의 물을 끌어올려 파리를 청소 하는 신기술을 소개했다. 실제로 그의 제안은 50년이나 지난 후에 퐁뇌프 다리에 설치한 “사마리아 여인 펌프”(현재 Samaritaine 백화점 자리)로 실현되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영원히 돌린다”고 말했다.
1626년 2월 28일에 사망한 드꼬스는 파리의 한묘지에 안장되었다(현재 Passage Basfour 끝자락). 1864년 3월 2일, 현재 “기술공예 박물관”근처에 드꼬 스를 기리는 도로명(Rue Salomon de Caus)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