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은 소유가 아닌 행함이다
나택권 장로(부산노회 호산나교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가난한 사람이 언제나 있을 것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과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 네 손을 펼치라고 하셨다(신 15:11). 부유와 가난함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다. 즉 너무 가난해서 남을 전혀 도울 수 없는 사람이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능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그 대상도 찾게 되는 것이다. 교회도 이 세상을 위해서 보냄을 받아 존재하기에 교회의 참 사명은 인류와 세상을 섬기는 일이라 하겠다.
우리는 글과 말에서 신앙을 찾고 있으면서 막상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에서는 그 신앙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해도 우리 주변에 있는 배고파 우는 사람, 병마에 고통스러운 사람, 외로움에 몸을 떠는 사람 등, 그렇게 아파하는 사람이 부지기수 임에도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누가 저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겠는가? 교회가 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선교, 교육 그리고 봉사인데, 특히 봉사는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일이며 복음 가치를 위해 투자하고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과 저들의 춥고 배고파하는 사연을 결코 뒤로하고 모른 체할 수 없는 것이다
연말 되면 자선냄비로부터 시작하여 교계 각 단체나 언론이나 사회단체들이 중심으로 앞다투어 불우이웃돕기 운동을 마치 연례행사처럼 펼치고 있다. 우리가 과연 1년 내내 그렇게 불우이웃을 돌아볼 사이도 없이 바쁜 생활이었는지 한 번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하셨다. 우리가 선행하는 것은 결코 자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 주기 위해 따뜻한 모습을 저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조그마한 빛이 어두움을 밝히듯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이 세상에 비치게 해서 그들이 복 받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우이웃을 돕는 것은 저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이지만 남을 돕는 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이 풍요로워짐을 느끼게 된다.
추운 겨울이다. 과연 우리가 이웃과 나누는 삶을 통해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는가 먼저 자신을 한 번 돌아보자. 바울 사도는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다(갈 6:61). 만일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사람의 필요를 공급해 주지 못하면 가르치는 자 스스로 자신과 식구를 부양하는 다른 일을 찾아보아야 하므로 이렇게 되면 교회는 영적으로 궁핍을 겪게 된다. 바울 자신이 고린도에 영적인 복음을 뿌렸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올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듯이 복음 전하는 자는 그것으로 생계를 이를 자격이 주어진다(고전 9:11).
그러나 오늘날 농어촌에 산재하여 있는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현실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직접 생계비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교회가 나서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성탄헌금이나 신년헌금 등 특별헌금을 교회 자체 경상비로 사용하지 말고 미자립교회 목회자들과 그의 자녀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도록 모든 교회가 참여하자. 선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행함의 대상이다. 마음이 굳어져 궁핍한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