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43] 빛나는 인물: 격정의 시인 도비녜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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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인물: 격정의 시인 도비녜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아그리빠 도비녜(Agrippa d’Aubigné, 1552-1630)는 위그노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도비녜를 낳으면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젊은 국왕 프랑수와 2세를 가톨릭 세력에서 빼내려고 꾸민 엉부와즈 모의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모의가 실패하여 수많은 동료들이 처형을 당하자,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마음속에 복수심을 심어주었다. 도비녜는 일찍 파리에 가서 고전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선생님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오를레앙, 제네바, 리옹 같은 여러 도시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네바에서는 떼오도르 베자에게 직접 배웠다. 16살이 되자 도비녜는 위그노 진영을 이끄는 꽁데 왕자의 군대에 입대하였고, 이때부터 대하 서사시 “비극”(Les Tragiques)을 쓰기 시작하였다(1616년 출판).

바뗄레미 대학살(1572년)을 벗어난 후, 여러 차례 가톨릭과 싸우는 전쟁에 참전한 도비녜는 위그노 신앙을 충직하게 지지하면서 군인과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앙리 나바르(후일 국왕 앙리4세)의 친구와 동지가 되어 꾸뜨라 전투(1587년)와 파리 공성(1590년)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그는 앙리 4세와 측근들의 귀를 따갑게 만드는 고언을 참지 못하는 격정적인 성품 때문에 자주 호감을 잃어버렸다. 도비녜는 앙리 4세가 국왕이 된 후에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간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1593년). 이 때문에 왕을 섬기는 것을 접고 뿌와뚜의 농가로 물러나 집을 개축하고 농사를 지었다. 번잡한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잠시나마 단조롭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위그노와 가톨릭을 화해시키려는 여러 시도에는 끝내 적의를 접지 않았다.

앙리 4세의 치하에서 위그노와 가톨릭 사이에 종교전쟁이 멈추자 이제는 신학 논쟁으로 이어졌다. 도비녜는 군인으로서 날카로운 검을 가지고 가톨릭을 위협했던 것만큼이나 문인으로서 혀를 가지고 위그노 신앙을 변호하였다. 1600년, 어떤 가톨릭 주교가 종교 토론을 벌일 생각으로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도비녜는 아무 두려움 없이 참석하였다. 진수성찬이 베풀어진 식사 자리에 4백 명이나 되는 가톨릭 신학자들과 수도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다섯 시간이 넘도록 그들과 토론하면서 은혜에 의한 구원을 거침없이 설명해 갔다. 토론 끝에 주교가 포도주 잔을 높이 들고는 도비녜의 승리와 재능을 축하하였다.

도비녜는 문필가로 유명하다. 그가 1616년에 펴낸 “역사”(Histoire Universelle)는 종교전쟁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다룬다. 편견을 버리려고 노력했지만 이 책은 정죄를 받아 소각되었고 그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1620년). 그는 제네바로 피신하여 여생을 보냈다. 무엇보다도 자그마치 9천 행을 가진 그의 대 서사시 “비극”은 명성이 자자하다. 위그노 동료들이 겪은 박해에 영감을 받은 도비녜는 1577년 집필을 시작하여 1616년 출판하였고 여러 번 개편하다가 마침내 1623년 제네바에서 증보판을 냈다. “비극”은 그의 일생을 기울인 역작으로 전쟁, 박해, 신앙을 주제로 삼는 서사시이다. 그는 증언의 책임을 느끼며 매우 격한 언어를 사용하여 종교전쟁 당시 위그노가 겪었던 고난을 서술한다. 성경에서 영감을 받은 이 서사시는 현재의 고난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으로 이끄는 여정에 관한 예언적 환상을 담고 있다. 이 서사시는 묻혀 있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비로소 세간에 알려졌다.

도비녜의 자손은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장남은 가톨릭 쪽으로 기울었다. 장남의 딸로 루이 14세의 비공식적 두 번째 왕비가 된 프랑수와즈는 낭뜨 칙령을 철회하도록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차남은 위그노 신앙을 이어갔다. 그의 자손들은 결국 1680년대 말 프랑스의 탄압을 피하여 신대륙으로 망명하였고, 버지니아에 정착하여(1715년 경) 이름을 다브니(Dabney)로 바꾸었다. 시인, 군인, 역사가인 도비녜를 기념하는 길이 파리 4구에 남아있다(Rue Agrippa d’Aubign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