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1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출판 감사예배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자(롬 8:1-2)
총회장 박병선 목사 (동부교회)
먼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개정번역을 위해 7년에 걸쳐 수고해주신 우리 신학연구위원회 위원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마침 오늘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일인데,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의 말씀과 나아가 오늘 우리를 개혁하도록 만드시는 말씀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입니다.
1. 자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대로 종교개혁의 역사는 말씀에 근거한, 즉 성경 진리에 근거한 자유의 역사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잘못된 교리로부터의 자유, 미신적인 예배의식으로부터의 자유, 영적 계급주의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또한 루터가 쓴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밝힌 ‘성례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거짓된 예식의 노예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그 무엇보다 종교개혁은 잘못된 구원론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고행과 선행, 금식 등의 굴레, 즉 구원을 얻기 위해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온갖 율법적인 의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만 생각하면 죄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언제나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자기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야 하는 ‘능동적인 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적 삶에 집중하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기도, 금식, 고행 등 각종 엄격한 수련에 힘썼지만, 그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두려움 속에 지옥을 경험하며 살았다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다가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율법을 다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율법의 의’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즉 구약 성경에서 이미 증거해 온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이 ‘수동적인 의’를 깨닫고 나서 루터는 춤을 추며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대문들을 통해 낙원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나는 과거에 그토록 증오했던 말씀, 즉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을 이제 증오만큼이나 더 깊은 사랑으로 칭송한다. 그것은 내게 가장 달콤한 말씀이다. 그리하여 바울의 그 구절이 내게는 참으로 낙원으로 가는 대문이 되었다.” 루터는 이처럼 죄로부터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의 때문에 본문 로마서 8장 1절~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에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되는 인생이 아니라 이후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2. 개혁
종교개혁이라고 할 때 ‘개혁’(Re-formation)은 교회적으로는 교회의 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고 잃어버렸던 교회의 영광과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성도 개인적으로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주님 닮은 인격과 삶의 사람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혁’을 다른 말로 ‘진정한 구원’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죄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 받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일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고 매일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생명의 성령께서 말씀의 다스림을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개혁은 수동적입니다. 이 사실을 토머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을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재의 패턴으로 변화되어 가는 수동적인 과정이다.” 우리가 거듭나고 예수님의 인격과 삶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의지와 능력을 따라 예수님을 닮아보겠다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실 때 나는 수동적으로 이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은 존재가 되어져 갑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면서 예수님 닮은 인격과 삶의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개혁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사람이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관계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비난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셨음은 기뻐하고 찬송하면서 생명과 성령의 지배 아래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스스로 ‘뭘 해 봐야 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시작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말씀을 연구하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졌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인격적으로 반응하여 순종하며 나아가다 보니 종교개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앞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사는 것이 개혁적인 삶이요,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내가 수동적으로 다루어지는 경험이야말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진정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사역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사역이 되어야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설교 준비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본문이 정해지면 수도 없이 읽으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까지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단지 본문을 연구하여 이해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사역도 수동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연구와 묵상이 다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요, 그럴 때 확신과 담대함으로 전할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설교 작업이 ‘능동적인 작업’으로 끝나고 있지 않는가 살펴야 합니다. 진정 변화와 개혁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말씀 사역이 되려면,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신 말씀이 되도록 성령 안에서 부단히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된 교회(성도)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주심으로 계속 개혁되어야합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말씀 앞에서 인격적으로 반응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교회의 영광과 능력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개혁의 유산이 우리에게서도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