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속죄의 범위’논쟁 소고_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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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속죄의 범위’논쟁 소고

< 이남규 목사, 서울성경신학대학원 교수 >

 

서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하여 성경은 그 표현에 있어서 보편적일 때가 있고 제한적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며(요 3:16)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며(고후 5:15)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요일 2:1-2).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으며(롬 8:31-32),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며(마 1:21), 한 무리의 양의 목자이며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며(요 10:15-16),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요 17:9).

이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다. 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보편성 또는 일반성을 말해야 했으며, 동시에 특별성 또는 제한성을 말해야 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계시인 성경 전체에 맞게 말해야 했다. 여기에서 속죄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개혁신학의 관점에 대해 야콥 안드레애(Jacob Andreae, 1528-1590)가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후 사무엘 후버(Samuel Huber, 1547-1624)가 개혁신학자들을 비판하는 격렬한 논제들을 출판하면서 수년간 논의되면서 많은 자료들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사무엘 후버가 이 주제와 다툰 주요 신학자들은 하이델베르크의 신학자들인 다니엘 토사누스(Daniel Tossanus, 1541-1602)와 야콥 키메돈키우스(Jacob, Kimedoncius, 1550-1596)였다.

 

1. 종교개혁 전 속죄의 범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교회는 처음에 속죄의 보편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가 속죄의 제한적 의미를 정죄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교회는 아직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구분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삼위일체와 기독론이 그러하듯 이단과 오류의 등장과 함께 교회는 말씀을 묵상하고 정당한 내용을 정리했다. 따라서 오리겐이 타락한 천사들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이 구속되었다고 말했을 때, 교회는 그런 보편적 구속사상을 거부했다.

아직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을 때 보편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특수성을 말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진다는 것을 암브로시스가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 고난당하셨을지라도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를 위해 고난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가 교회에 나타나자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싸우며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가 보편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한 사람도 제외하지 않는 모든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을 부정했다.

어거스틴은 디모데전서 2장 4절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모든 계층으로 대표되는 인류 전체라고 생각했다. 즉 왕과 백성, 귀족과 평민,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 모든 어족, 모든 직업 등과 같은 다양성으로 생각했다.

이런 보편성의 해석에 따라 요한일서 2장 2절의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에서 ‘온 세상’을 모든 나라에 있는 교회로 보았다. 즉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퍼진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 즉 하나님의 의도가 보편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도도 보편이 아니어야 하는 일관성이 어거스틴에게 있었다. 그는 성경의 보편적 표현에 대한 해석을 각 구절의 문맥에 따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다양성의 보편성과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보편으로 보았다. 이렇게 해서 어거스틴은 속죄의 특수성을 분명하게 가르쳤던 첫 번째 학자로 언급된다.

어거스틴 사후에 반펠라기우스주의가 목소리를 높이자 어거스틴을 옹호하고 나선 이가 프로스퍼였다. 프로스퍼는 보편성에 대하여서는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성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 그 자체로 해석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유익이 누구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는가와 관련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을 신자들 곧 택함받은 자들에게 연결시킨다. 이로써 프로스퍼는 초기에 그리스도의 의도라는 관점을 보여준 가장 명백한 주창자로 불린다.

그 후 롬바르두스에 이르면 ‘충분’과 ‘효과’라는 중요한 구분이 생긴다. 그는 그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가 온 세상을 위할지라도 교회를 위하여 고난받으셨다는 내용을 가치의 충분과 가치의 효과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진술했다.

 

이후 신학에서는 ‘충분’과 ‘효과’는 중요한 개념이 되어서 아퀴나스도 그리스도의 고난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할지라도 믿음과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연결된 자들 밖에는 그 효과를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보편성과 특정성에 대한 ‘충분과 효과’라는 분명한 구분이 롬바르두스에게서 시작되면서 이후 이 구분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이해하는 고전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개혁신학자들에게 하나의 중요한 표준으로 자주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2. 하이델베르크신학자들의 속죄 논쟁의 역사적 배경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칼빈은 그의 예정교리에서 보듯이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의도된 구원이 성경적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속죄에 대한 범위도 제한적으로 본다. 특히 요한일서 2장 2절의 화목제물이 우리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칼빈의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난다.

이 주석에 따르면 칼빈은 유기자들에게까지 속죄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거절하면서 속죄의 특정성을 강조한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디모데전서 2장 4절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원하신다’는 구절에도 적용된다.

칼빈에 의하면 이 구절의 문맥에서 사도가 가르치려는 것은 세상에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어떤 민족이나 계층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음이 예외 없이 모두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충분과 효과’의 구분을 말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구절의 해석에 들어가서 (적어도 요일 2:2에서) 이런 구분이 적용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칼빈에게 ‘세상’이나 ‘모든’이라는 단어는 온 세상에 보편적으로 흩어져서 믿을 자들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칼빈의 뒤를 이은 신학자는 베자였다. 베자는 1586년에 안드레애를 대표로하는 루터주의자들과 몽벨리아르(Montbéliard, Mömpelgard)에서 만나 토론을 했다.

개혁파를 대표해서 제네바와 베른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총대(이들 중에 베자와 아브라함 무스쿨루스<Abraham Musculus> 등)가 파송되었고, 루터파를 대표해서는 야콥 안드레애(Jacob Andreä)와 루카스 오시안더(Lucac Osiander) 등이 파송되었다. 이 토론은 1586년 3월 21일에서 29일까지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다룬 주제는 성만찬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위격과 양성 문제, 세례, 성상의 문제, 예정의 문제까지 다양했다. 예정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 문제도 다루어졌다.

3월 29일 예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때 안드레애와 뷔르템베르크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이 사람들의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선택하고 유기했다는 절대적 예정을 거절했다. 특히 안드레애가 하나님의 결정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처해진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베자는 하나님의 자비가 결정되었듯이 하나님의 진노도 결정되는 것이라고 로마서 9장을 근거로 대답했다. 다만 그들이 정죄되는 근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유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안드레애의 질문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 문제로 주제가 넘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경에 있는 구원에 대한 보편적인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리고 베자가 ‘세상’을 택함받은 자들로 제한하자 안드레애는 이에 반대하며 ‘세상’이 전체 인류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모두’(omnes)나 ‘세상’(mundus)이 단지 ‘어떤 자들’(aliquos)만을 뜻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베자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구절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동시에 베자는 ‘모두’가 의미하는 보편성을 유대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은 자비의 그릇으로 준비했다는 다양성의 의미로 해석했다. 따라서 베자는 요일 2장의 ‘온 세상’을 위한다는 말은 바로 유대인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들로부터 있는 택함받은 자들이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안드레애는 그리스도가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요일 2:4)이라고 할 때의 세상은 모든 인간들이어야 하고, 따라서 요한복음 3장의 세상은 모든 인간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베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분성이 실제적이라면 그 효과까지 실제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저주받을 자까지 속죄의 대상이어야 하는 모순에 빠지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으로 위하신 자들은 보편적 교회(Catholica Ecclesia)라고 답했다.

이상을 정리하면 칼빈과 베자에게서 어거스틴과 프로스퍼와 같은 이해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세상’과 ‘모두’라는 보편적 표현들은 지역과 신분에 제한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지역과 모든 계층에 흩어진 택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곧 충분과 효과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나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3. 사무엘 후버와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

베자와 안드레애의 몽벨리아르의 토론의 내용이 출판되자 베른에서 사무엘 후버(Samuel Huber)라는 인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소란이 일어났다.

후버는 개혁파 진영을 대표해서 베자와 함께 몽벨리아르 토론에 참석한 베른의 신학자들이 베른의 전통과 어긋난 행위를 했다고 고소했다. 베른의 신학자들인 아브라함 무스쿨루스(Abraham Musculus)와 페트루스 휘브너(Petrus Hübner)가 베자의 논제에 동의하는 의미로 서명을 했는데, 이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1588년 4월 후버가 제기한 문제를 판단하기 위해 베른에서 공적 토론이 열렸고,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 다른 도시들로부터 신학자들이 도착했다. 결과는 무스쿨루스가 옳고 후버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후버는 면직 당했고 뷔르템베르크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같은 주제로 후버는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과 논쟁을 이어갔다. 이 논쟁의 중심 인물로 토사누스와 키메돈키우스가 등장하게 된다.

 

가. 토사누스

1586년 3월 몽벨리아르에서 베자와 안드레애와의 토론이 있었던 그 해 11월 19일과 23일에 토사누스는 예정론 논제를 발표했다. 이 논제는 흥미롭게도 유기를 중심 주제로 다루었다. 그리고 1588년 사무엘 후버가 등장하는 베른 논쟁이 발생했다.

개혁신학을 가르치던 하이델베르크에서도 이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은 당시 루터파와 새로운 논쟁 주제로 떠오른 속죄의 범위에 대한 답변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1589년 7월 5일 토사누스는 이 주제를 다루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구절의 의미와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 죽었는가?”에 대한 답변이었다. 여기에서 토사누스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을 통해 첫 아담과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지 설명한다.

먼저 첫 아담과 둘째 아담은 서로 유비적 관계에 있어서 머리와 그들에게서 나오는 족속을 뜻한다. 첫째 아담은 죄와 죽음을 출발시켰고 둘째 아담은 의와 생명을 만드는 자요 저자이다. 바로 이런 원리 아래서 모든 자들이 아담 안에서 죽었듯이, 중생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토사누스의 핵심 주장이다.

죄인된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며, 영생을 얻는 모든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표현인 ‘모두’는 바로 이런 이해에 근거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모두’이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방식으로 생명을 얻은 ‘모두’라는 사실은 토사누스에게 중요하게 보인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토사누스에게서 구속의 대상과 성화의 대상은 같다. “딛 2:14에서 구속의 은택이 성화의 은택과 함께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주셔서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속량하시고 자기 백성이 선한일의 특별히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깨끗하게 하려는 것이다.”

속죄의 대상과 구원의 대상이 같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 교회론과 연결된다. 사도신경에서 ‘내가 교회를 믿는다’(credo Ecclesiam)라고 할 때에 그 의미는 영원 전에 정하신 무리를 말하며, 그리스도는 그 무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 무리를 복음의 설교와 성령을 통해 값없이 부르시고 믿음을 주셨다.” 그래서 속죄 받은 무리,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는 무리는 같은 무리로 교회가 되며 이들이 창세전에 택함받은 무리인 것이다.

사실 토사누스의 논제는 후버를 직접적으로 상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안드레애로 인하여 떠오른 루터주의자들의 보편속죄론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후 후버가 토사누스를 공격하면서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은 직접적으로 후버를 상대한 글들을 출판했다.

 

나. 키메돈키우스

토사누스의 논제가 출판된 이후 후버는 속죄의 논쟁을 폭발시킨 책 ‘Theses, Jesum Christum esse mortuum pro peccatis omnium hominum (1590)’(논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을 출판한다. 이 책에서 보편속죄론자들의 주장이 상세하게 해설되었다. 반면에 키메돈키우스는 후버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칼빈주의의 입장을 대변한다.

후버의 주장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차이도 없이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모든 인간의 죄는 충분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용서되었다.” 후버에게 이것은 하늘 아버지가 전 인류를 은혜로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각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부터 의로, 옛 것에서 새 것으로 옮겨갔다. 모두가 구원과 은혜의 왕국의 공동체에 속했다. 모두가 (즉 유기자와 택자가) 그들이 믿던 믿지 않던 동일하게 구원받았다.

그러면 후버는 멸망의 원인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토사누스가 말한 대로 후버에게 유기자의 멸망의 원인은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 그리스도를 통해 사해졌기 때문이다. 대신에 불신을 제시한다. 오직 불신 때문에 그들은 성취되고 주어진 화목을 파괴시키고 효과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키메돈키우스가 볼 때 후버는 펠라기우스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믿음에 구원이 달려있게 되어서 구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렸다는 점에서 후버의 아버지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다.

키메돈키우스는 영생이 모두에게 준비되어 있고 구원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게 되어서 후버가 화목의 결정적 원인을 사람의 의지에 놓았다고 평가한다. 키메돈키우스가 속죄의 범위를 다루면서 구원의 근거로서 예정교리를 방대하게 다루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보편속죄론자들이 강하게 증거로 내세우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을 키메돈키우스는 어떻게 해석할까? 여기서 세상이 한 세상인지 두 세상인지에 대한 논쟁이 생겼다.

후버에게 세상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양을 보라(요 1:29). 하나님은 그래서 인류에게 차이 없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키메돈키우스의 대답은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실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두가 갖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있는 곳에 양자됨이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화, 회개, 영생, 믿음, 성레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

속죄의 범위에 대한 교리는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를 정죄하면서 밝힌 이후 그 효과에 있어서 특정적 또는 제한적이라는 것이 교회의 견해이다. 다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 또는 크기 자체가 작다는 것도 동시에 거절해왔다.

몽벨리아르에서 베자와 안드레애의 논쟁에서 보듯이 보편속죄론자들은 충분을 모든 인류를 위한 실제적인 죄의 속죄 또는 만족으로 보았고, 효과는 인간들 자신의 믿음에 의존하는 것으로 돌렸다.

그 이후 벌어진 사무엘 후버와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특히 토사누스와 키메돈키우스)과 벌어진 논쟁에서 그 분량이 많아졌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가 택함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기본적인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부정하는가?”라는 비판이 개혁신학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를 값없게 만드는가라는 비판도 주어졌다. 이런 비판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주어진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 자체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자의 경우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선 피 한 방울로도 충분하다(만일 온 세상의 죄의 효과적 속죄를 원하셨다면이란 가정 하에)고 진술한다.

둘째, ‘모두’ 또는 ‘세상’에 대해 성경 전체와 해당 문맥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키메돈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특정 무리를 가리키는 보편적 표현, 즉 택함받은 자들 모두이며 신자들 모두이다. 2) 구속의 방식과 관련한 보편적 표현, 즉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받는다. 3) 다양한 형태와 계층을 가리키는 보편적 표현, 즉 유대인만이 아닌 세상 모든 족속, 남자나 여자, 주인이나 종 모두이다. 4) 외적 소명의 대상인 보편적 표현, 즉 구원은 모두에게 제시되며 모두가 초청받는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개혁신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이란 구원의 모든 은택들을 효과적으로 얻으신 죽으심이다. 즉 성령에 의한 중생, 소명, 신앙, 성화, 영화까지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얻으셨다. 따라서 그의 속죄의 죽으심과 구원의 적용을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속죄의 대상과 중보 또는 구원의 대상이 같다.

보편속죄론자들은 개혁신학자들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닫아 놓고 자신들의 교리가 열어놓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속죄론자들의 교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높이고 모두에게 구원을 여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불신을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도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신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유효한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믿음을 사셨고,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피는 족속에 제한받지 않으며, 재산의 유무에 제한받지 않으며, 지식의 유무에 제한받지 않으며, 인간의 불신에 제한받지 않는다. 속죄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우리의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