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의 이름으로 선을 넘다
강희민 목사(일신교회)
100년 만에 다시 파리에서 개최된 올림픽이 여러 논란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파격적인 개막식 공연부터 논란이 되었다. 목이 잘린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노래하고 반라의 가수가 식탁 위에 누운 채로 등장하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그 뒤로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열두 제자를 연상시키는 사람들을 배치했는데 전부 드래그 퀸(여장 남자)이었다. 같은 프랑스인들 사이에서조차 역겹다는 반응이 나왔고,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다. 주최 측의 즉각적인 사과가 있었지만, 개막식 예술 감독(토마 졸리)은 “다양성 속에 모두를 포용하려고 했던 것”이며,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과연 5년, 10년 뒤에는 어떨까? 개막식 감독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는가를 살펴본다면, 후자처럼 될 개연성이 적지 않다. 또 다른 논란이 복싱 경기장에서 있었다. 남성 염색체를 가졌다는 선수가 여성 경기에 출전했고 상대 선수들을 압도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선수의 경우 올림픽 위원회(IOC)와 국제복싱협회(IBA)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어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사실 남성 염색체를 가진 선수들이 여성 경기에 출전하는 일은 이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있는 사건들이 가능해진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에도 일부 사람들의 일탈이 없지 않았지만, 그때는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이 있었다. 그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언정 선 자체는 선명하게 존재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부분이 무너지고 있다. 다양성과 인권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선 자체를 지우려는 시도가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탈 권위를 외치며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개인주의 풍조가 합세하여, 보편적인 가치와 윤리라는 둑을 빠른 속도로 허물고 있다. 수면 위에서 선 넘는 행위들이 점점 더 광범위하게 벌어질 뿐 아니라 합법적인 행동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수면 아래에서 모든 선을 지워버리려는 시대 조류가 도도하게 흐르면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며 불편했던 사람들도 시대정신이라는 배를 함께 타고 5년, 10년을 떠내려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생각이 바뀌기 십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20년 2월 대법원이 개정한 지침에 의하면, 성전환 수술이 성별 정정의 필수 요건이 아니다. 이에 따라 작년 3월 서울서부지방법원 재판부는 남성으로 출생 신고 된 트랜스젠더가 성전환 수술 없이 여성으로 성별 정정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올해 5월 청주지방법원도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은 신청인 5명에게 가족관계등록부에서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다고 판결했다. 남자의 몸을 그대로 가진 채 여성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무엇일까. 이미 중앙선(남녀의 경계)을 지워버린 세찬 조류가 인도와 차도의 경계선(인간과 동물의 경계. 사람과 AI의 경계)마저 지우려고 들진 않을까. 과연 그때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다울 수 있을지. 그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외치며 지키려는 인권이란 도대체 무엇일지.
그래도 소망이 있다. 사람들이 아무리 지우고 덮으려 한다 해도 여전히 선은 거기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남자와 여자 외에 제3, 제4의 성을 상상하고 그려낼지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건 남자와 여자일 뿐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 1:27). 선을 넘고 지우며 겪는 고통과 부작용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사람들로 하여금 본래 자리를 그리워하고 돌아가게 만드는 강한 반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그때 다시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외치게 되리라. 제한 없는 다양성의 추구는 자유가 아닌 방종이요, 분별없는 포용은 사랑이 아닌 무책임이라고. 우리에게는 올바른 기준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요 인권이라고. 극단적이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다양하고 아름다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매년 다시 보아도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알록달록 다양한 빛깔로 단풍진 가을이 증명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