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이 교회로 바뀌다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루이 16세는 할아버지 루이 15세와 달리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관용 정책을 펼쳤다. 그는 “베르사유 관용 칙령”(1787.11.7)에 서명함으로써 위그노들에게 시민권을 허용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역설적으로 이 칙령의 배후에는 예수회(Jesuit)의 진골에게 속했던 말스허브 신부가 있었다. 그는 “위그노에게 우리 선배들이 해를 끼친 만큼 나는 선을 베풀어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박해를 완화한 까닭에 위그노들에게 “좋은 루이”라고 불렸지만,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 폐위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고(1793.1.21), 아홉 달 뒤에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1793.10.16.).
왕정을 폐지하려는 열광적인 혁명파와는 달리 위그노는 왕정을 지키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쟝뽈 라보(생 에띤느) 목사이다. 그는 광야교회 지도자로 눈부시게 활약하면서 제7차 광야 총회(1758.9.1-9)의 의장을 맡았던 뽈 라보 목사의 아들이었다. 쟝뽈 목사는 1785년 미국 독립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돌아온 라파예트 장군에게 발탁되어 루이 16세를 지지하는 쪽에 섰다. 후일 라보 목사는 국민의회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개혁파 신학의 순종 원리를 따라 루이 16세의 심판을 반대하면서 왕정 구체제(엉성 레짐)를 지지하는 바람에 자코뱅 당에 의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8.26)은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같은 대규모 사건들이 연속되면서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가운데 빠졌다. 이런 난국 끝에 쿠데타로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장악하였다(1799년). 나폴레옹은 제1공화국의 제일 총통으로 올라서면서 1802년부터 가톨릭, 위그노, 유대교 같은 프랑스의 종교를 재편하는 정책을 폈다(Concordat). 국가가 성직자에게 봉급을 주고 종교 건물을 관리함으로써 종교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종교재편 정책의 일환으로 다수의 가톨릭 성당을 신교에게 넘겨주었다. 대표적으로 파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당이 교회로 바뀌었다.
1632년과 1634년 사이에 프랑수와 만사르가 건축한 생트마리 성당(현재 Église protestante du Marais). 프랑스 혁명 당시 이 성당은 예배당을 제외하고는 매각되거나 철거되었다. 1803년 5월 1일, 나폴레옹은 이 예배당을 위그노가 예배를 드리도록 넘겨주었다.
1747년 삐에르 꽁땅이 건축한 뻥드몽 성당(현재 Temple de Pentemont) : 이 성당은 혁명 당시 곡물창고로 사용되다가 군사용 건초 창고로 바뀌었다. 1803년부터 위그노에게 이양되었다.
빌레트 성당(현재 Billettes Temple) : 빌레트 초기 수도원의 역사는 12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원 건물은 1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중세 고딕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756년에 재건축되었고, 혁명기에는 소금 창고로 사용되었다. 1808년 루터교회가 나폴레옹에게 이 건물을 제공받아 수리하여 1809년 11월 26일 첫 예배를 드렸다.
오라투와뒤루브르 성당(현재 Temple protestant de l’Oratoire du Louvre) : 위그노가 처음에는 생루이뒤루브르 성당을 제공받았지만 1806년에 철거되는 바람에 1811년부터 예배 장소를 오라투와뒤루브르 성당으로 대치하였다. 이것은 1630년 오라토리 종단이 건축한 것으로 파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인 루브르 바로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전성기에는 국왕 루이13세와 재상 리셀리외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했지만, 혁명기에 한동안 방치되다가 코미디 극장의 물건과 의상을 두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1811년, 나폴레옹에게 이 성당을 이양 받은 위그노는 앞에 사용하던 생루이뒤루브르 성당의 목재를 활용하여 실내를 신교 예배에 맞게 단장하였고 마롱 목사가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