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격해야 할 주관적 성령 운동들
현대 개신교 신자들에게 있어 신앙의 뿌리는 공통적으로 일반종교적인 주관주의(Subjectivism)가 자리하고 있다. 즉 장로교든지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단 등등에 상관없이 기독교 신앙을 스스로의 주관적 경험에 근거해서 정립하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개신교의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숙주(宿主)라고 할 수 있는 이 주관주의는 슐라이에르 마허(1768-1834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곧 17세기 이후 근현대의 신학론의 중심이 급격하게 ‘성령론’의 강조로 치우치게 되는데, 이때의 성령론이란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와 지나친 비판에 따른 반동적인 신학의 오류이자 세계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성령 운동가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방하면서 중교개혁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고착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주관주의적 경험에 더욱 강조점을 두었다.
그 결과 주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성령께서는 항상 성경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함께 하시거나 성경을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으로 오해되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세속과 맞닥뜨려서 합리주의를 태동시켰고, 급기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 이성의 강조와 역사주의에 대한 강조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대안을 주장하며 주관주의적 기독교 종교관을 근본적으로 확장한 이가 바로 슐라이에르 마허다. 이후 대부분 개신교의 흐름은 슐라이에르 마허의 ‘종교론’(1799년)의 범주 안에서 주관주의로 포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신자로서 개혁해야 하는 것은, 각자 성령의 내재 가운데서 어떤 새롭고 비상한 경험을 통해 성령의 뜻을 확신하며 나아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 가장 확실하고도 견고하게 성경 가운데서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 ■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가운데서 그리고 성례(세례와 성찬) 가운데 영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시는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진리’(요 4:24)에로의 개혁이어야 한다.
그런 개혁이란 실천이나 방법들의 강조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해를 지향하는 “신령과 진리”의 개혁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정통적 교리(신조)를 배우고 익히는데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