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35] 까미자르 전쟁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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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자르 전쟁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위그노들은 루이 14세의 낭뜨 철회 이후 20년 동안 강화된 온갖 모진 박해에 대항하여 무력 저항을 전개하였다. 낭뜨 철회 이후 신교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어, 위그노 교회의 공식 예배와 개인 성경읽기가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교회당들은 무너지고, 위그노 마을이 약탈당했다. 목사와 신자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거나 갤리선으로 끌려가고, 사형에 처해졌다. 위그노들은 강제로 가톨릭으로 전향하여 미사에 참석해야만 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위그노들이 왕정에 무력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 동남부 세벤느 지역의 위그노들은 강력한 무력 항쟁을 펼쳤다. 1702년 7월 24일 샐라의 가톨릭 수도원장 프랑수와 드 랑글라드가 신교 신자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 해와 1705년 사이에 왕군과 항군 사이에 격한 전투가 벌어졌고, 1710년까지 산발적으로 전투가 이어졌다. 저항군은 주로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는데, 까미자르라고 알려진 흰색 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까미자르”(Camisards)라고 불리었다. 그래서 이 전쟁을 보통 “까미자르 전쟁”이라고 부르며, 세벤느 지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세벤느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싸웠다.

까미자르 전쟁에서 한몫을 톡톡히 한 것은 성령님에게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예언자들이었다(후에 제네바 출신 목회자들이 예언자들의 활동을 정리하였다). 예언자들이 참전을 부추겨서 위그노들은 계시를 믿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까미자르는 성령님의 인도를 확신했기 때문에 고도로 훈련받은 정예부대 왕군에게 아무런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무적의 용맹성을 과시하였다. 그들은 한껏 목소리를 높여 시편 찬송을 부르면서 과감하게 행진하였다. 까미자르의 대범한 공격 앞에서 왕군은 여지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까미자르는 귀족이 참여하지 않았고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 아닌 민간인으로 형성된 군대였다. 군대의 절반은 세벤느 농민이었고, 절반은 양모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까미자르는 한 단위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라 여러 독립적인 소규모 부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하다가 특정한 전투를 위해서는 연합전선을 이루는 방식을 취하였다. 까미자르 군대는 자기 부대에 충성하는 집중성과 함께,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소속하는 유연성을 가진 특이한 구성체였다. 게다가 그들은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일터로 돌아가서 주민 속에 흔적도 없이 혼합되었다.

까미자르 부대들의 지휘관들은 20대 초반이었다. 예를 들면, 롤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삐에르 라뽀르뜨(1680-1704)는 22살에 까미자르 지도자가 되었다. 라뽀르뜨는 1704년에 피살되었다. 프랑스 동남부에 소재한 그의 생가는 현재 위그노 역사를 보여주는 광야박물관(Musée du Désert)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제빵 숙련공이었던 쟝 까발리에(1681-1740)는 21살에 까미사르 전쟁을 이끌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교 신앙을 갖춘 부모 아래 성장하였고 신앙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에 머물다가 전쟁이 터지던 해에 세벤느로 돌아와서 까미자르의 지도자가 되었다. 까발리에는 남 프랑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릴라 전술을 펴서 왕군을 교란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런 전술은 심지어 적군 사령관 빌라르까지도 감탄할 정도였다.

마침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년)에 신경을 쓰느라 까미자르를 전력으로 제압할 겨를이 없었던 루이 14세는 휴전을 제안하였다. 1704년 5월 16일, 루이 14세는 까발리에를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연봉을 지급하는 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까미자르 전쟁은 일단락을 지었다. 이에 분격한 대원들에게 비난받은 까발리에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전전긍긍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난민부대를 창설하여 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였다(1705년). 더블린에 정착한 까발리에는 후일 저시(Jersey)의 부행정관을 역임하였다(1738년). 나중에 꾸르 목사가 와서 공동체를 재건한 후에야 비로소 남부 위그노들은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