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만나고 싶었습니다] 박병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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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박병식 목사(송파제일교회 원로, 증경총회장)

1940년생인 박병식 목사는 1967년 총신대학원을 졸업하고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장성중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한 뒤, 1971년 송파제일교회를 개척하여 만 35년간 목회하다가 2007년 은퇴하였고, 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박 목사는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1972년부터 1985년까지 고려신학교에서, 또 1985년부터 2006년까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목회학을 강의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교단 최초로 2년간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총회 헌법 발간에 크게 기여하였다. 요즘의 근황이 궁금하여 김학인 편집국장이 박병화 목사(상동21세기교회, 본보 이사장)과 함께 박병식 목사를 만나 동행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국장 : 목사님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박병식 목사 : 매일 오전 4시 30분에 기상합니다. 아침 식사할 때까지 기도와 성경 말씀 묵상을 합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걷기 운동을 합니다. 집에서 오 분 거리에 있는 시내를 따라 난 도로를 걷습니다. 시내 양편에 다양한 나무들이 있고 사이사이에 각종 식물과 꽃나무들이 자라는 모습이 너무나 좋습니다. 걷는 동안 찬송을 부릅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전도합니다.

오후에는 성경을 읽고 곁에 늘 쌓여있는 10여 권의 도서들을 읽습니다. 다독하기보다는 정독하고 있습니다. 정독하다 보니 성경이나 다른 책들을 읽는 속도가 느립니다. 때로 전에 느껴 보지 못한 감격에 잠겨 있곤 합니다. 기도 노트를 들고 기도 의자에 앉아 기도합니다. 저녁에는 뉴스를 듣습니다. 그리고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를 드리고 9시 30분에 잠자리에 듭니다. 꼭 그대로 하기로 정해 놓았으나 나름대로 항상 바쁘고 계획대로 한 적이 별로 없어서 다른 계획을 세우는 일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편집국장 : 목사님의 신앙 이력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세요

박병식 목사 : 저는 모태신앙자입니다. 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매우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동네 밖을 8km 이상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당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 어릴 적 저의 추억의 전부입니다.

부모님은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인근 도시에 있는 모 교회의 사찰이 되셨습니다. 저의 십 대의 추억은 그 교회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김훈 목사님과 임운택 목사님을 친구로 만났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복음에 뜨겁고 열정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세 사람은 주님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고 총신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합동교단 목사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합동교단은 지방색 갈등과 교권의 타락으로 혼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단 모 노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노회에는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총신대 사태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노회에서 축출당한 개혁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노회에서 조용히 나가 합신에 소속하게 되었습니다. 합동교단에서 노회의 일부가 합신으로 옮겨온 것은 유일하였습니다.

편집국장 : 평생 목회자로 살아오셨는데 감사한 일은 무엇인가요?

박병식 목사 : 송파제일교회를 개척하고 오늘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교인들 대다수가 철거민들로 구성된 송파 평화촌에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송파제일교회는 파키스탄 깰라솨(Kalasha) 부족을 입양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제패하고 인도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공은 비참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의 군대 중 패잔병들이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을 깰라솨 부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위한 사역에 큰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부족들 중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와 문명 세계와 접촉하고 공부를 한 결과 지금은 주님의 종이 되어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이들도 있고, 의사가 된 이들도 있고, 공무원이 된 이들도 있습니다. 마을에 의료센터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국내에 여러 교회들을 개척하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낳아야 된다”는 원칙대로 처음부터 교회 개척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미자립교회들, 개척 초기에 있는 교회들을 후원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여러 선교사님을 후원하고 협력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것이 큰 기쁨이요 감사요 보람이었습니다.

편집국장 : 합신 교단은 목사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박병식 목사 : 합신의 주장은 시초에서부터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었습니다. 저에게 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저는 35년 목회하는 동안 이 체계에 따라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단순히 교리적으로 설교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성경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윤리론에 이르기까지 바른 신학의 체계를 오직 성경으로,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제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교회를 은퇴하기 전 마지막 설교를 하는 주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날 성도들이 너무 많아 한 의자에 한 명씩 더 앉게 하였습니다. 접의자 50여 개를 여기저기 놓았습니다. 그래도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 있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저에게 그 광경은 큰 격려였습니다. 제게 합신이 없었다면 이런 목회의 감격이 제게 없었을 것입니다.

편집국장 : 앞으로의 계획이나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병식 목사 : 우리 합신 안에는 고단한 삶에 지쳐있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은퇴하신 목회자들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걷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은 바리새적이요, 위선이요, 외식이요. 가식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스데반과 같은 천사의 얼굴, 베드로 사도와 같은 말씀의 능력, 바울 사도와 같은 복음의 깊은 진리, 바울 사도와 같은 신유의 은사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큰 산을 문제로 보지 않고 기도로 봅니다. 합신 가족 모두가 이러한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