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8] 사건과 함께: 세 앙리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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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세 앙리의 전쟁

역사가 얄궂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비슷한 또래의 정치 수장이 각축전을 벌린 “세 앙리의 전쟁”은 역사의 얄궂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바뗄레미 대학살(1572년) 이후 프랑스의 정세는 판도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이른 바 세 명의 앙리(Henri)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첫째 앙리는 국왕 앙리3세이다(1551년 생). 앙리는 바뗄레미 대학살로 촉발된 네 번째 종교전쟁에서 위그노와 힘겨운 전쟁을 수행하던 중에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대학살 때 왕좌에 앉아있던 그의 형 샤를르9세가 후유증으로 미치다시피 한 상태에서 사망하자 앙리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였다. 가톨릭 동맹(리그)은 앙리가 정치와 종교에 너무 우유부단하다며 압박을 가하였고, 앙리는 가톨릭 동맹에 충성하는 구역들을 봉쇄하기 위해 파리 시내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앙리의 행동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벽돌, 술통, 목재 등으로 방책을 쌓아 군인들을 역으로 봉쇄하였다. 화들짝 놀란 앙리는 루브르궁을 탈출하였다(바리까드의 날 1588.5.13.).

둘째 앙리는 후일 국왕 앙리4세가 된 앙리 나바르를 가리킨다(1553년 생). 앙리는 위그노의 정치적 수장이었던 쟌느 달브레 여왕의 아들로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진행된 정략결혼의 주인공이었다. 바뗄레미 대학살 때 그는 왕족이기도 하지만 가톨릭으로 전향할 것을 서약한 까닭에 죽음을 면하고 왕궁에 억류되었다. 앙리는 3년 반 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위그노의 정치적 최고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약관을 막 벗어난 나이였지만 다섯 번째 전쟁부터 위그노 군대를 지휘하기 시작하였고,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위그노 세력을 규합하여 왕정과 가톨릭 세력을 크게 위협하였다.

셋째 앙리는 기즈 가문의 앙리를 말한다(1550년 생). 그는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이미 종교전쟁에 참전하여 가톨릭 군대를 이끌었다. 앙리는 바뗄레미 대학살의 실질적인 주모자였다. 그는 아버지 프랑수와 기즈의 피살을 복수하기 위해 대학살 당일에 측근들을 보내어 꼴리뉘 제독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1584년 9월, 앙리는 동생들과 함께 앙리 나바르를 왕좌에서 배제시킬 목적으로 가톨릭 동맹(리그)을 만들었다. 앙리는 대학살 이후 가톨릭 동맹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면서 북 프랑스의 정치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특히 파리 시민들에게 “파리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열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국왕 앙리를 크게 압박하였다.

이렇게 세 앙리는 거의 비슷한 또래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삼파전으로 벌렸다. 앙리 기즈에게 원한을 품고 언젠가는 제거할 마음을 가졌던 국왕 앙리는 중대한 일을 상의하려는 듯이 블루와 성에 있는 알현실로 불러 독대하는 자리에서 미리 숨겨둔 자객들에게 신호를 보내 한순간에 살해하였다. 1588년 12월 23일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병상에서 아직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모후 까뜨린느 메디시는 셋째 아들 국왕 앙리의 처사를 생각이 모자란 행동이라고 심하게 나무랐다. 가톨릭의 반격을 받은 국왕 앙리는 앙리 나바르와 연합을 도모하였는데, 그로부터 8개월이 채 안되어 피살되고 말았다. 파리를 공략하기 위해 생끌루에 숙영하고 있는 국왕에게 광신적인 도미니칸 수도사가 비밀 메시지를 전달한다며 접근해서 복부를 칼로 찌른 것이다. 1589년 8월 1일이었다. 국왕은 다음날 사망하였다.

두 앙리가 피살되고 결국 앙리 나바르만 남았다. 앙리는 왕위 승계법을 따라 국왕이 될 합법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위그노가 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가톨릭 세력(앙리 기즈의 동생 마옌느가 이끔)의 저항을 받아 힘겨운 싸움에 돌입하였다. 앙리는 여러 차례의 전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위그노 신앙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가톨릭으로 전향하여 마침내 파리에 입성하였다. 1610년 5월 14일, 앙리4세는 가톨릭 열성분자의 단검에 찔려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피살되었다. 얄궂게도 “세 앙리의 전쟁”은 세 앙리가 모두 피살되어 종지부를 찍은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