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5] 사건과 함께: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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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

위그노가 파리에서 첫 번째 총회를 마친지 겨우 한 주간이 지난 시점에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교하였다. 1536년, 27세의 깔방은 기독교강요 초판을 세상에 선보인 다음 여러 번 손질을 거쳐 1559년에 최종판을 출판하여 개혁신학의 정초를 놓았다. 또한 깔방은 31세가 되던 1540년에 라틴어 로마서 주석을 출판한 이후 55세로 인생을 마감할 때(1564년)까지 성경주석을 펴내 개혁파의 성경해석에 모범을 세웠다. 깔방은 성경의 사람이자 신학의 사람이었다. 이런 깔방이 생애 마지막 활동으로 집중한 것은 학교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사실 이것은 깔방이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중요한 사업이었다.

깔방이 학교 건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고양 없이 안 되는 개혁의 현실적인 한계를 타개하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학교 설립의 다른 이유는 개혁파 신학을 그의 세대에 묶어두지 않고 후세대로 넘겨주기 위한 위대한 이념 때문이었다. 깔방은 이런 사상을 이미 1541년에 작성한 교회법령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가 황무지 같은 곳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하며, 자녀들이 목회직과 시민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해야만 한다.”

드디어 1559년 6월 5일 월요일, 제네바 삐에르 교회에서 아카데미가 시작되었다. 먼저 깔방이 학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시의 서기인 미쉘 로세가 신앙고백을 낭독한 후,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받아들여야 할 법규를 비롯해서 학장과 교수와 교사가 행할 서약을 담고 있는 아카데미의 규정을 공표했다. 이어서 학장으로 선출된 베자가 연설을 함으로써 직무 수행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연설 중에 “단지 교훈을 받거나 그리스인들처럼 운동장의 덧없는 게임을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임무를 위해서, 그리고 사명을 이루기에 합당한 병사가 되는 의무를 위해서 모인 것”이라고 말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두 가지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7학년 제의 초등교육과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교육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과정이었다. 고등교육과정에는 고전어 교육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인문학과 신학이 더해졌다. 이것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서 하나님 지식에 도달하려는 수단을 강구한 것을 의미하며, 또한 교회와 시 정부를 둘 다 책임지는 일꾼을 배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교육과정은 개신교 목사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등교육과정의 학생들은 등록하면서 신앙고백에 서명한 다음 강의에 참석했다. 고등교육과정은 학생들이 혼자서 또는 동료와 함께 공부하는 자발적 학습 제도였다. 신학교수는 깔방과 베자, 두 명이었다. 두 사람은 중세의 영적 해석을 멀리하고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종교개혁 성경주해의 기초를 놓았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첫해부터 대성황을 이루었다. 첫해에 유럽 전역에서 온 학생들이 등록하였는데, 다수가 프랑스 출신 학생들이었고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 그 외에 중유럽 출신 학생들이었다. 베자의 추정을 따르면 1559년(개교)부터 1564년(깔방 사망)까지 초등교육과정에는 1,200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고등교육과정에는 300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이와 같은 학생수는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혁교회를 위하여 유럽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와 그 밖의 개혁파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훈련된 목사들을 파송하는 일이 제네바 목사회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1555년부터 1562년 사이에 제네바 목사회는 11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주력은 프랑스에 88명의 선교를 파송한 것이었다. 프랑스 선교사들 가운데 11퍼센트에 달하는 10명이 순교의 자리에 이르렀다. 제네바의 프랑스 선교사 파송은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