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자(살전 5:18)
박윤선 박사
감사는 힘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님
우리는 기도를 힘써야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감사도 힘써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세스 몬테피을은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생각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고 힘쓰지 않고는 감사 생활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자들은 힘쓰지 않고 감사 생활을 해보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우리가 힘써야 감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부패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① 인간은 부패하여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린다. 실례를 들자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잊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잘 잊어버린다.
② 인간은 부패하여 허욕(虛慾)이 많으므로 감사할 줄 모른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도 적게 여겨 불만해하며, 하나님이 주신 참 것은 눈떠 보지 않고 도리어 허망한 것을 참되게 여겨 바라본다. 이것은 인간에게 허욕이 많은 까닭이다. 예를 들자면, 요한일서 2:22이 말한 것과 같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가장 큰 거짓말이지만 인간은 도리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옳은 것인 줄 알고 덤빈다.
③ 인간은 부패하여 은혜를 적게 받으면 불만하게 여기고 많이 받으면 심상히 여겨 감사할 줄 모른다. 우리는 육신 생활에 있어서도 값없이 태양 빛을 보며 공기를 마신다. 만일 태양 빛과 공기의 값을 매긴다면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그 값을 낼 만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빛과 공기에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인 중에도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그보다도 영원히 죽을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영원히 복된 영생에 들어가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하여 뜨거운 감사를 가지는 자가 많지 못한 듯하다.
④ 인간은 부패하여 도적의 심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은혜를 받고도 그것을 도리어 갚으려는 노력과 대상(代償)은 하기 아까워하고, 그냥 자기의 개인적 야욕(野慾)을 위하여 달아난다. 여러 해 전에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큰 호수에서 배가 파선된 때에 스펜서라고 하는 청년이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물에 빠진 승객들을 16명이나 건져냈다. 그러나 그에게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인생은 이렇게 도적의 심리를 가졌다. 남의 도움을 공짜로 받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당연한 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도적의 심리라고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 17:11-19에 있는 대로 열 나병환자가 다 같이 고침을 받았으나 그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 밖에는 다 감사하지 않고 제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남의 일에 대하여 감사하자
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대주재시니 그의 목적과 행사는 작은 인생들의 목적과 행사와 다른 방면이 많다. 이사야 55:8,9에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작은 인생들에게 어떤 때에 깨닫기 어려운 방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재앙과 환난을 보내는 일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6월 25일 사변 때도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버스를 타고 자기 집으로 가다가 중도(中途)에 헌병이 병정으로 쓰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잡아 내릴 때 그 목사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 집에 가지 못하고 어떤 곳에까지 잡혀가 거기서 목사인 것을 알리니 놓여나기는 하였으나 중도(中途)에서 밤을 지나게 되었다. 그 이튿날 자기 집에 가보니 그 전날 밤에 군대에서 기관총으로 목사 주택을 향하여 기관총으로 빗발같이 난사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그 목사가 집에 있었더라면 자기마저 죽을 뻔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일시적 고난을 주어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때에 우리로서 알기 어려우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하나님을 위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 이해 관계있는 여부(與否)를 물론하고 하나님의 일이라면 감사히 여겨야 한다. 욥은 자기의 재산과 자녀들을 다 잃어버린 때에도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고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였다(욥 1:21). 이렇게 욥은 자기가 손해를 본 가운데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인 경륜인 것을 알고 찬송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로 말미암아 어떤 손해를 보았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감사하고 찬송해야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두 하시는 일은 우리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든지 없든지 결국 우리에게 복이 되기 위하여 하시는 것이다. 감사절을 처음 제정하고 발표한 워싱턴의 선포문에 말하기를 “나는 11월 6일 미국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선포하노라. 하나님은 과거의 은혜와 현재의 은혜와 장래의 은혜를 만들어 주시는 영광의 하나님이라” 하였다. 워싱턴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 감사할 때에 과거와 현재의 은혜뿐만 아니고 미래의 은혜까지 위하여 감사하였다. 하나님은 미래의 성도에게 주실 은혜가 더욱 크다. 그의 은혜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시편 135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26번이나 거듭 말하였다.
⑵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그 정신은 남이 잘 되기를 원할 뿐만 아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은 단체 생활에 있어서 결국은 나 자신이 잘 되는 것과 같다. 나를 둘러싼 이웃 사람들이 흉악하여 불행한 자들이라면 나는 얼마나 그 가운데서 고통을 당할 것인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잘 될 때에 내가 기뻐한다면 그만큼 내 기쁨의 이유는 많아진 것이다. 우리는 자아(自我)라 하는 작고 좁은 속에 갇혀 살 때에 언제나 불만과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 같이 생각하여 그들을 사랑할 때에는 그만큼 나의 생의 무대는 넓어지고 인생의 사정(事情)을 아는 식견(識見)이 높아져서 기쁘고 유쾌하고 감사하기만 한 생활이 계속하게 된다. 남들을 나 자신과 같이 생각하는 생활은 그만큼 위대하고, 고상하고, 깊고, 넓고, 밝고, 행복되고, 유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감사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한 줄 잘 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죽음 때문에 영원히 살게 되는 은혜를 받았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멸망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린 결과로 이 세상 불신자들도 자기들도 모르게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지 측량할 수 없다. 무디 선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극히 귀하게 여기는 뜻으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남기고 가신 것은 피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다. <제공 : 영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