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합신문학상 수상작] 가작/수필 : 막판에 가서야 역사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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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에 가서야 역사하시는 하나님

오태용 목사(분당풍성한교회 원로)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듣고 잠시 얼떨떨했다. 이 나이에 문학상이라니! 무슨 글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그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1967년도 대학입시는 3수생인 나에겐 사활이 걸린 마지막 승부의 싸움이었다. 또 낙방하면 영락없이 군대를 가야 할 처지였다. 국어 시험은 모국어인데도 공부가 쉽지 않은 과목이었다. 마침 무슨 제목으론가 작문하는 문제가 있었다. 나름 쉽게 쓸 수 있었다. 이유는 고교 시절 매일 일기를 써왔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덕분에 군대보다 먼저 대학을 갈 수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글쓰기는 연습이 필요하다. 글쓰기를 잘하면 어느 분야에서나 잘될 수 있다. 어느 여성은 초등시절 글쓰기를 잘해서 큰 상을 받고부터 승승장구, 대학교수가 되었고,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나 역시 일생을 돌아보며 전기적인 책을 준비하고 있다. 가제는 <고비마다 길이 있었다!>. 늦은 나이이지만 새롭게 시작해볼까? 기독교개혁신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성경에 나이와 관련된 중요 말씀이 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시 90:10). 그 말씀대로 나는 이제 칠십을 지나고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나의 지난 칠십 평생을 돌아볼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막판에 가서 역사하시더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한 번 그런 게 아니라 삶의 고비마다 막판에 가서야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있는데, 그 말대로 되었다.

“얘들아, 우리 순천시로 이사를 가야겠다.” 부모님이 우리 4형제를 불러놓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 가족은 전남 순천시[그 당시는 승주군] 해룡면 해창리에서 살았다. 뒤에는 높은 산이 있고, 앞에는 큰 들판이 있었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순천만으로 흐르는 작은 강이 아름다웠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면 바로 강 가까이에 우리가 짓는 농토가 몇 마지기 있었다.

우리 집이 살기 힘들어진 것은 해마다 9월이 지나고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풍 때문이었다. 순천만 바다로부터 세차게 밀려오는 해수가 강을 타고 순천시 쪽으로 덮치게 되면 들판 전체가 수침을 당해서 논농사를 망쳐버린다. 이러기를 연달아 3년 정도 겪고 나니 빚만 늘어나고 살길이 막막해졌다.

마침 한 동네에 사는 어느 집에 삼십 리 떨어진 순천시에서 가끔 찾아오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이분이 우리 어머니를 자주 만나다보니 우리 집 형편을 알게 되었다. 이 아주머니가 자주 말씀해주셨다. “태용이 엄마, 여기서 죽을 고생 하지 말고 순천시로 이사를 하세요. 거기 가면 벌어먹을 게 많아요. 괜히 여기 있다가는 자식들 공부도 못시킨단 말예요!”

어머니는 그 말을 예사로 듣지 않으셨다. 자식들 교육과 생존을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순천시로 무작정 이사를 결정하셨다. 어머니의 이 결정이 좁게는 나의 운명과 넓게는 우리 형제들의 앞길을 활짝 여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때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그 아주머니와 부모님께 깊이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순천시로의 이사!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가나안 땅을 향한 우리 가정의 엑서더스였다고 믿는다.

순천시에서의 삶은 진짜 힘겨운 나날이었다. 도움 받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우리 4형제(위로 형,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 이렇게 7식구가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살았다. 아버지는 지게꾼 노동을 하시고, 어머니는 장날이면 노점을 하셨다.

나는 6학년 때 순천시로 이사하여 초등학교를 마쳤는데, 7식구가 먹고 살기도 벅찼기에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더러 일찌감치 이발소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다. 그런데 미션스쿨인 순천매산중학교에서 금년부터 장학생 5명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형이 하루 전에 입학원서를 제출해줘서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시험을 보게 되었다.

며칠 후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장학생 1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엉겁결에 중등교육의 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평소에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중학입시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졸업하면 이발소에 들어가서 머리 감기는 일부터 배울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중학교 수석입학이라니 …… 이 학교에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뭔가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중등교육의 문이 열렸지만, 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난생 처음으로 반장도 하고, 학급을 이끌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시골 출신이라 워낙 기초가 없고, 또 상황파악이 느리다보니 공부하는 법을 알지 못해서 헤매다가 2학년으로 올라갈 때는 장학생 혜택을 받지 못했다. 수업료를 내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나는 중학교 2, 3학년을 겨우 마쳤으니 고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마침 한 지인 덕분에 나는 순천시 교육청에 급사로 취업이 되었다. 월급은 700원! 그리고 1년 후에 순천 매산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4시간씩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내 친구 중에 장○○군이 있다. 그는 아버지가 양복점을 경영하기에 넉넉한 환경에서 공부했다. 친구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나와 같은 반이었는데, 고교는 나보다 1년 앞서게 되었다. 서울에 있으면서 그는 좋은 참고서들을 내게 보내주고, 서울대를 가면 돈 없어도 공부할 수 있다며 격려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코치를 받으며 서울대학교 진학을 꿈꾸게 되었다.

첫해에 겁도 없이 서울공대 화공과에 응시했는데,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 당시 크게 낙심한 것은 수학시험이었다.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가우스함수>에 관한 문제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지방 소도시의 야간고교 출신이라 이런 고급 문제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인생이 서럽게 느껴졌다.

이듬해에는 아예 응시를 하지 않았다. 서울대가 어디라고 함부로 덤빈단 말인가! 그래서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이상 공부해야겠다는 독한 맘을 먹고 한 해 걸러 세 번째 해에 다시 서울대에 도전했다. 그 친구가 여러 수학 참고서를 사다주고 해서 나름 공부를 하고 이번에는 서울대 사범대를 지원했다. 국립사대는 수업료가 면제되고 공납금이 얼마 안 되었다. 나는 과를 선택할 때 영어선생이 가장 낫지 않겠나 싶어 외국어교육과 영어전공을 선택했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친구 Mr. 장이 서울 용두동 사대 캠퍼스에 가서 내 이름을 확인한 후 급히 기쁜 소식을 전했다. 정원 25명 안에 들었다는 것이다. 이게 웬 축복인가! 지역신문에도 기사가 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확인은 하지 못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구나!

시골의 야간고교 출신이 어떻게 한국 제일의 서울대 사대 영어과에 합격이 되었을까? 당시 서울사대 영어과는 상당한 인기학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 25명 정원 가운데 서울고와 경기여고, 이화여고, 숙명여고 등 명문고교 출신들이 많았다.

나의 서울사대 영어과 합격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의 산물이라고 믿고 있다. 영어를 통해 나를 사용하시려는…… 지난 30여 년 이상 목회하면서도 틈틈이 70권 이상의 영문 신앙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님께서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결과라고 확신한다. 내가 3수를 하고 있을 때 가을쯤 군대 입영 영장이 발부되었다. 합격자 발표 후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다. 이번 입시에 실패하면 영락없이 군대를 가야 할 운명! 매일 새벽예배에 나가 절박하게 기도하는데,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침공을 받았을 때 했던 기도가 마음에 얹혔다. 그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렸고, 응답을 받았다(사 37:14).

나는 군대 입영 통지서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새벽마다 죽기 살기로 기도했다. 그냥 기도만 하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번 3수 입학시험에 합격을 시켜주시면, 졸업 후 첫 월급을 하나님께 몽땅 다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이것도 당시 내 형편에서는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아마 이 기도응답으로 내가 합격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 나중에 그 서원대로 첫 월급을 주님께 드렸다.

대학 졸업 후 나는 교직생활을 5, 6년 하고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늦게 신학을 하고 바로 교회를 개척했다. 당시만 해도 전도가 되는 시절이어서 금방 100여 명의 성도가 모이게 되었다. 6년이 지나자 교회에서 나에게 안식년을 주면서 해외유학의 기회를 허락했다. 나는 미국 남부에 위치한 Bible School로부터 입학허가를 받고 비자 신청을 했다.

당시는 미국 영사관에서 목사가 비자를 받기란 심히 어려운 때였다. 목사들이 미국에 유학 가서 나오질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자대행자는 나의 경우, 하자가 없다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영사관 담당자는 서류를 보더니 돈이 부족하다면서 퇴짜를 놓았다. 다음 주에 돈을 더 준비해서 갔더니 이제는 다른 핑계로 거부했다. 알고 보니 비자를 주지 않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서류 심사하는 곳을 설명하자면, 직원이 7, 8명 앉아서 서류를 접수한다. 들어갈 때 임의로 하지 못하고 공중화장실처럼 차례대로 빈자리가 나면 그 직원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맨날 여성 직원 앞에 서게 되었는데, 6~7번 거부를 당했다. 너무 지쳐서 이젠 포기하고 영국으로나 가볼까 생각하고 8월말에 마지막으로 줄을 섰다. 이번에는 백인 남자 직원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는 내 서류를 한 번 훑어보더니 즉시 오케이 하며 승인해주었다. 웬일이지? 내 서류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똑같은 서류였는데! 막판에 이 남자 직원이 나를 살려 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일이라 믿는다.

마지막 순간 번제 단 위의 이삭을 살리셨듯이 하나님은 고비마다 나를 살려주시고 새로운 문을 열어주셨다. 순천시로의 이사, 중학교 입학, 대학교 합격, 유학비자발급 등 그 모든 불가능이 막판에 가능해졌다. 그것은 요셉처럼 위기마다 구원의 손길을 펴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한나의 노래에서 보듯, 진토에서 나를 일으키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실 일이 있었다고 믿는다. 70여 권의 영문 신앙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30년 목회 은퇴 후에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성도들의 질병 치유 사역을 4년째 하고 있다. 지나온 70년 이상의 세월을 돌아볼 때, 절박한 삶의 고비마다 나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