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에 대해 생각한다
장재훈 목사(내흥교회)
오늘날 반려견을 키우는 인구가 수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특히 혼자 사는 자들이 반려견을 키우고 있다. 2021년 4월 23일 농림축산식품부가 보도 자료를 냈다. 여기에서 전국 638만 가구에서 반려동물을 860만 마리를 키운다고 했다. 대단히 많은 숫자이다. 지금은 더욱 많을 것이다. 반려견(伴侶犬)이란 ‘인생의 짝이 되는 개’라는 말이다. 고양이도 많이 키운다. 반려견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은 반려견을 ‘자기 아이’, ‘자기 새끼’, ‘자기 자녀나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반려견이 아프거나 죽으면 마치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고 애통해 한다. 장례식도 치러준다.
정확히 말하고 넘어가면 반려견은 사람처럼 자기 아이나 자녀나 가족이 아니다. 자녀, 가족의 대상은 사람뿐이다.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람과 함께 산다고 가족이나 자녀가 아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2023년 5월에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2주 전 한 여성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다가와 가방을 열며 ‘내 아이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작은 개였다”고 한다. 이에 교황은 단호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전 세계적으로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다. 역사는 항상 성경 세계관에 반하게 돌아갔고 현재나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잘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사랑에도 금도가 있다. 마치 사람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결혼해야 하지만 같은 동성을 사랑하거나 결혼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 것처럼, 애완견 사랑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누구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는 존재이든지 반려견은 사람이 아니라 이성이 없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식물과 동물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지으시고 주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창 2:19)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먹을거리)이 되리라”(창 1:29)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먹을거리)이 될찌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모든 동물은 다스림의 대상이지 목숨을 다해서 사람처럼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다. 또한 식물처럼 먹을거리로 주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반려견이라고 호칭하면서 인간처럼, 인간 이상처럼 사랑의 대상, 떠받듦의 대상이 되었다. 집안과 방안에서 함께 산다. 이미 동물 사랑과 키움에 대한 금도의 선을 넘어버렸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반려견 천지이다. 사람에게 쏟아 부어야 할 시간, 돈, 사랑을 반려견에 투자하고 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처하여 나무, 돌, 산, 강, 태양, 어떤 조각상 등 어떤 우상을 숭배하는 것처럼 반려견을 대하고 있다.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다. 아주 심각한 상태이다. 사랑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다시 강조컨대 모든 동물은 동일하다. 사람과 친근하다고 해서,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고 해서 다른 차원의 동물이나 짐승이 될 수 없다. 이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 어떤 식물, 동물, 짐승도 인간과의 친분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닌 이성과 양심을 갖지 않은 피조물일 뿐이다. 이것이 성경말씀이다. 동물끼리도 차별해서는 옳지 않다. 어떤 동물은 식물로 되고 어떤 동물은 식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성경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기독교인들의 모든 신앙과 행위의 근거는 성경이다. 만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맞는 일이다. 살아있는 식물이나 동물은 학대하지 않아야 한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딱 거기까지 해야 아름다운 것이다. 인격적 동반자로까지 생각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뿐이다.
예를 들어, 사막에서나 어디에서나 말을 타고 다닌다고 해서 말이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 반려견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떤 동물도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반려견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이는 마치 동성애자를 성소수자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다. 그냥 말, 소, 개, 고양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것이 아담이 붙여준 이름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어떤 분위기로 흐르거나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하든지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입장을 취해야 한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대세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반려견에 대하여 사람처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고 대하는 것을 볼 때 심히 우려스럽다. 반려견은 사람도, 자기 아이도 아닌 그냥 동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