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10] 역사 속에서: 앙리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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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앙리3세

모후 까뜨린느는 왕위를 지키던 두 아들 프랑수와2세와 샤를르9세를 잇따라 잃은 후, 셋째 아들 앙리3세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앙리는 까뜨린느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었다. 앙리는 한 살 위의 형 샤를르가 위그노를 참혹하게 살해한 바뗄레미 대학살의 후유증으로 반미치광이가 되어 비명횡사한 덕에 왕위에 등극하였다. 앙리는 바뗄레미 대학살 직후 대군을 이끌고 위그노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인 라로쉘을 다섯 달 동안이나 공성하였는데, 왕군에 비해 병력이 겨우 20분의 1밖에 안 되는 라로쉘의 성문을 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차에 폴란드 왕으로 선출된 것을 핑계 삼아 종전 협상을 맺었다. 그런데 1년이 채 못 되어 샤를르가 숨을 거두자 앙리는 폴란드 왕위를 박차고 프랑스 왕으로 돌아왔다.

앙리는 재주가 많았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로, 쩍하면 모후에게 도움을 구하러 달려가는 나약한 인물이었다. 앙리는 즉위하자마자 가톨릭 세력에게 노리개 감이 되었다. 가톨릭 세력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귀족 앙리 기즈를 구심점으로 가톨릭 리그(동맹)란 것을 만들어 국왕 앙리를 거세게 압박하였다. 국왕은 가톨릭 동맹의 압박에 굴복하여 느무르 조약을 맺어 위그노 예배를 엄금하고 목사들을 추방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 땅에는 다시 전쟁이 불붙었다. 8차 위그노 전쟁은 자그마치 1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국왕 앙리, 가톨릭을 대표하는 기즈 앙리, 위그노를 대표하는 나바르 앙리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뒤엉킨 이 갈등을 “세 앙리의 싸움”이라고 부른다.

파리의 열여섯 구역 대표들은 국왕 앙리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앙리 기즈는 “파리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도를 부리면서 국권을 쥐고 흔들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국왕 앙리는 가톨릭 세력을 진압할 요량으로 파리 시내에 군대를 진입시켰는데, 도리어 군대 진입에 불만을 품은 파리 시민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파리 시민들은 거리 곳곳에 바리게이트를 쳐서 왕의 군대가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돌을 던지는 등 거친 반응을 드러냈다. 이것이 “바리까드의 날”(1588.5.13.)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너무나 겁에 질린 앙리는 황급히 인근 도시 샤르뜨르로 도피하는 극심한 수치를 맛보았다.

수세에 몰린 국왕 앙리는 일단 가톨릭 동맹의 압박을 진화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모후 까뜨린느에게 중재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앙심에 사로잡힌 국왕은 마침내 가톨릭 동맹의 우두머리 앙리 기즈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에 국왕은 기즈를 블루와 성으로 불러들였고, 내실에 잠복해 있던 친위대의 칼이 기즈를 찔러숨통을 끊어버렸다(1588.12.23.). 국왕은 기즈의 피살 소식을 들은 모후 까뜨린느에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는 매서운 질책을 받았다. 기즈가 피살 당한지 두 주간이 채 안 되어 모후는 7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양보 없는 가톨릭 신앙을 지닌 이탈리아 여자로 프랑스 왕비가 되어 남편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고 세 아들을 섭정했던 까뜨린느는 불안한 정국을 지켜보면서 눈을 감은 것이다.

앙리 기즈를 살해하여 궁지에 몰리고 모후의 사망으로 정신적 붕괴에 빠진 국왕 앙리는 가톨릭 동맹의 압박을 벗어날 새로운 탈출구를 자아냈는데, 다름 아니라 위그노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짓을 보낸 것이다. 위그노의 정치적 수장인 나바르 앙리는 밀고 당기는 미묘한 관계 속에서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래 위그노를 공격하던 국왕이 이제는 위그노와 손을 맞잡은 형세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국왕 앙리는 그의 변심에 분노가 맹렬하게 타오른 가톨릭 도미니크 열광주의 수도사가 휘두른 칼에 찔려 하룻밤 만에 숨을 거두었다(1589.8.1.). 암살이 암살을 낳은 것이다.

앙리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발루와 왕가는 자동적으로 단절되고, 왕위 계승법을 따라 방계의 1순위였던 위그노 수장 나바르 앙리에게 왕위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그가 바로 위그노 역사에 뜻밖의 굵은 획을 그은 부르봉 왕가의 앙리4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