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바뗄레미 대학살
꽃길 결혼식이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피범벅 학살극으로 바뀐 것은 불과 엿새 만이었다. 위그노의 정치적 수장이었던 나바르 여왕 쟌느 달브레의 아들 앙리가 까뜨린느의 딸이자 국왕 샤를르의 여동생 마르그리뜨와 결혼을 하였다. 쟌느가 혼사를 앞두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상태에서, 결혼식은 1572년 8월 18일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꼴리뉘 제독을 위시하여 수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앙리의 결혼을 축하하러 혼인날에 맞추어 속속 파리로 입성하였다.
간교하고 음흉한 가톨릭 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의 피살로 꼴리뉘에게 복수의 앙심을 품고 있던 앙리 기즈는 까뜨린느와 야합하여 이참에 위그노 지도자들과 귀족들을 한꺼번에 소탕할 음모를 꾸몄다. 어떤 역사가들은 까뜨린느를 학살 주범의 혐의에서 구제해내려고 애쓰지만, 그 노력은 기껏해야 주범에서 공범으로 감량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혼식이 끝난 지 나흘째 되던 날 아침 꼴리뉘를 먼저 제거하려던 암살시도는 오른쪽 어깨와 왼손 집게손가락을 부상시키고 마는 실패로 돌아갔다. 상당한 위험을 감지한 측근들이 파리를 속히 떠나도록 꼴리뉘를 설득했다. 하지만 꼴리뉘는 부상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서 당분간 자리를 지키기로 하였고, 위그노 귀족들도 별 다른 방도를 마련하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그대로 남았다.
그 사이 까뜨린느는 아들인 국왕 샤를르를 겁쟁이라고 부르며 심한 모멸감을 안겨주었고, 가톨릭 세력은 온갖 공갈로 국왕을 집요하게 윽박질러 위그노를 학살하는 승인을 받아냈다.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한 샤를르는 위그노를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 버리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행동을 개시할 시각이 정해지고, 파리 시장에게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성문을 걸어 잠그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위그노들이 센 강을 건너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보트들도 전부 거두어들였다. 왕명을 받은 행동대원들은 왼팔에 흰 천을 두르고 무장을 한 다음 횃불을 손에 든 상태로 무거운 침묵 가운데 살육의 시간을 기다렸다.
1572년 8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자정, 록세루와 성당의 종소리에 맞추어 루브르와 파리 시내 성당들이 일제히 종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바뗄레미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24일은 가톨릭교가 바뗄레미(Barthélemy)를 기리는 축일이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창밖에 촛불 설치하여 행동대원들의 움직임을 도왔다. 파리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극도로 흥분한 군중은 위그노들을 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치고 칼로 베고 밧줄로 목을 조르고 총으로 쏘고 창으로 찔렀다. 하루 동안 자그마치 3천 명에서 많으면 1만2천 명이 사지로 몰렸다. 결혼식의 주인공 앙리 나바르는 가톨릭으로 전향할 것을 서약함으로써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채 억류되었고, 그의 사촌 앙리 꽁데도 왕궁에 갇혔다.
앙리 기즈가 인솔한 부대는 꼴리뉘의 숙소로 들이닥쳤다. 딸과 사위, 왕실 주치의 빠레 그리고 메를랑 목사와 함께 이층 침실에 누워있던 꼴리뉘는 “나는 목숨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겼소”라고 말하고는 모두 도망치라고 명령하였다. 사위는 지붕 위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빠레는 왕실 주치의였기에 목숨을 건졌고, 메를랑 목사는 지붕 밑에 여러 날 숨어 있다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였다. 칼에 찔린 꼴리뉘는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앙리는 꼴리뉘의 머리를 베어 까뜨린느에게 바쳤고, 몸은 센 강으로 끌고 가서 물속에 처박아 썩게 만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 꼴리뉘의 사촌이 은밀히 유해를 수습하여 납 상자에 담아 꼴리뉘의 성채에 숨겼다. 그나마 손상되지 않는 대퇴골과 어깨뼈 그 밖에 부서진 뼈 조각 몇 개였다.
이후 학살은 여러 도시에서 수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대학살의 소식 앞에서 프랑스 위그노들뿐 아니라 신교를 지지하는 주변 국가들은 치를 떤 반면, 교황청과 가톨릭 세력은 환호성을 질렀다. 제네바의 베자와 함께 여러 신학자들은 폭군에 대한 무력저항의 정당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마침내 4차 전쟁이 발발하였다. 샤를르는 밤마다 살육 광경이 펼쳐지는 환각에 시달리다가, 역설적으로 위그노 주치의 빠레와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참하게 운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살육을 대속하는 값을 치룰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