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Talk)설교에 대한 평가와 성경적 설교의 이해」
문준혁 강도사(오정성화교회)
정답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족한 이래, 설교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교회 속에서 변화를 겪고 있다. 소위 전통적 설교라고 일컫는 ‘선포형 설교’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스탠드업 코미디/강연 형식의 설교가 교계에 상당 수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와는 달리, 한국은 그 고유의 신앙정서 특성상 설교자가 회중에게 선포하는 설교를 오랫동안 고수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교회의 설교형식에서도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스마트폰의 도입과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의 보편화로 인해 더욱 급격하게 밀려들어왔다. 이에 더하여 MZ세대, 정확히 말하자면 Z세대로 대표되는 신세대가 사회문화의 주류로 등장해서 각 분야의 기존 틀을 탈피하려는 시도들이 증폭한 것 역시 설교형식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변화의 한 예로서 근래에 이슈가 된 설교형식이 바로 ‘토크(Talk)설교’다. 2주 전인 2월 26일 주일,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만나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해당 교회의 담임 목회자인 김병삼 목사의 인도로 토크설교가 시행되었다. 국민일보에도 보도된 이 설교는, 조민제 국민일보 회장과 김병삼 목사가 마주보고 앉아 신앙과 인생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조 회장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 담임 목회자인 고 조용기 목사의 아들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했고, 김병삼 목사는 이에 대한 간결한 대화를 곁들였다. 47분에 달하는 전체 분량이 해당 내용들로 채워졌다. 교회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모든 분야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해야 하고, 예배 요소를 파악하고 수용하는 문제라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따라서 토크설교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성경이 제시하는 설교’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낭독하고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설교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기록하고 선포한 모세의 말들, 다시 말해서 흔히 모세오경이라고 불리는 창세기-신명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구약-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이라고 불렀다. 이는 히브리어로 הרָּוֹת(Torah)라고 하며, ‘가르침’이라는 뜻을 지니기에 그 자체로 선포적 성격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에게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이 듣고 배우게 하고, 그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명령했다(신 31:9-13). 모세 시대 이후에도 사무엘을 비롯한 모든 제사장/선지자들이 공적인 예배 현장에서 백성을 양육하는 방법은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낭독하고, 그 말씀의 교훈과 요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는 구약시대의 끝자락인 포로기 이후에도 나타난다. 느헤미야 8장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느헤미야와 함께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곱째 달 초하루, 곧 레위기 23:24에서 ‘안식하는 날’로 지정되어 온 이스라엘이 함께 예배하는 날에 광장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느 8:1)”했다. 에스라가 기록된 율법을 낭독했고,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깨닫자 다 울었다(느 8:9). 이후에는 에스라와 동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깨닫게 했으며, 이에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했다. 느혜미야 해당 단락의 결론은 그 즐거움의 이유를 가리켜 “그들이 그 읽어 들려준 말을 밝히 앎이라(느 8:12)”라고 설명한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유대인의 회당에서 “늘 하시던 대로” 말씀을 펴고 읽으신 뒤에 그 뜻과 교훈을 전파하셨고(눅 4:16), 바울 역시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풀어 강론했다(행 13:13-48; 18:4-5). 이 원리에 따라 바울은 한 교회의 설교자로 있는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명령했다. 사도 요한 역시 마지막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의 서두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헬라어로 단수형, 설교자를 가리킴)와 듣는 자(헬라어로 복수형, 청중을 가리킴)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3)”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만나교회에서 이루어진 토크설교를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성경이 제시하는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 비추어보자. 만나교회의 토크설교는 그 중 어느 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형식에 있어서는 계시의 말씀을 읽지도 않으며, 한 사람이 그 뜻을 해석하지도 않고, 그것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권면하거나 위로하시는 바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특정 개인의 인생과 그에 대한 대화가 두 인물 사이에서 오고갔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교회에게 주신 설교방식은 선포가 핵심이다. 모세와 제사장/선지자들이나 시편 기자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고 요구한 뒤 말씀의 교훈을 선포했다(민 15:18; 신 11:29; 사 40:9; 렘 1:7; 21:8; 겔 2:5,7; 3:11; 시 34:11; 78:1 etc.). 따라서 대화[만담]의 형식이나, 진리의 기준이 없이 청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혹자들이 반론할 때 예시로 들법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들’조차도 진리의 기준을 지닌 채 선포하시는 가르침이 없이 그들에게 물으셨던 것들은 하나도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교회에게 제시하신 설교들은 모두 그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한 강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알리는 것이 설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교훈을 내용으로 지니지 않는 것은,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고 한들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설교에 해당한다고 일컬어질 수 없다. 설교는 하나님의 입술이 되어 그분의 말씀을 주님의 양무리에게 전달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우리가 급변하는 사회의 물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만물의 주인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대한 방편인 설교에 대한 관념 역시, 이러한 인식 가운데 성경적으로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의 구절은 이러한 평가가 그 위에 서 있는 근거이자, 이 글의 적절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위기 10:1-2)
*미주 최경식, 「주일예배에 ‘토크 설교’ 만나교회의 특별한 실험」, 국민일보, 2023.02.28.,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