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태동의 전야 : 왈도파
1532년 9월 12일 샹포란(Chanforan) 회의 기념비
산 중턱 큰 샘에서 솟아나는 물줄기에 더 높은 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합류하듯이, 위그노의 역사에 더 오래 된 한 운동이 연합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프랑스 동남부와 이탈리아 서북부 사이에 펼쳐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알프스 자락 삐에몽 계곡 여기저기에 흩어져 은둔해있던 소수 집단 왈도파였다.
왈도파의 기원은 1218년쯤까지 살았던 신비의 인물 삐에르 왈도라는 사람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왈도는 본래 프랑스 리용의 큰 부자였는데 재산을 모두 처분한 후 빈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전래된 이야기를 따르면, 연회 자리에 흥을 돋우도록 초청받은 방랑시인이 들려준 노랫말이 왈도에게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란다. 그것은 혼인날 밤 갑자기 아름다운 신부와 안락한 인생을 내버리고 예수님처럼 가난한 삶을 따라간 로마 귀족 청년 이야기였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왈도가 예수님이 부자 청년과 나누신 하나님 나라와 하늘 보화 이야기(마 19:21-24)를 듣고는 가난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연유야 어떻든지 왈도는 재산을 들여 복음서를 민중의 말로 번역한 다음 작은 책자로 만들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빈자 전도 운동을 전개하였다(1176년). 왈도의 사상을 전하는 평민 설교자들이 사방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자 이 운동에 많은 사람이 따르면서 자연스레 공동체를 형성하여 왈도파 언약을 다짐하였다. 왈도파는 즉시 가톨릭으로부터 경계의 눈초리를 받았다. 특히 민중 복음서와 평민 설교자는 가톨릭의 신경을 따갑게 자극하였다. 성경과 설교는 사제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눈에 왈도파 운동은 성직계급주의에 대한 사악한 도전으로 비쳐졌다. 그 결과 왈도파는 이단으로 규정되고 출교를 당하여 종교개혁이 쇄도할 때까지 가혹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박해를 피해 알프스의 은밀한 계곡으로 깊숙이 숨어들어 어렵사리 살아남은 왈도파는 밖에서 스며드는 종교개혁의 소식을 들었다. 왈도파는 새로운 물결을 알아보기로 결의하였고 독일과 스위스 개혁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1532년 여름이 끝날 무렵 스위스와 프랑스 신교의 위임을 받은 파렐은 다른 한 명과 함께 샹포란에서 왈도파 지도자들과 회동하였다. 회합의 결과로 왈도파는 종교개혁에 가담하면서 위그노와 연합하여 개혁파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공식 예배는 프랑스어로 드리기도 결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왈도파는 원어(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직접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비용을 대기로 약속하였다. 번역은 쟝 깔방의 육촌인 올리베땅이 맡았고, 마침내 1535년 프랑스어 성경을 출판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깔방은 성경 전체를 위해 라틴어 서문을 썼고, 신약성경 앞에는 프랑스어 서문을 썼다. 신약 서문은 프랑스어로 인쇄된 깔방의 최초 문서로 복음 없는 인간은 아무 쓸모없는 허무한 존재라고 외친다. 사람은 복음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며, 성도의 동료가 되며, 천국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그노와 결합한 왈도파의 여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날이 시퍼렇게 선 박해의 칼날이 여전히 그들의 심장을 겨누었다. 이제 막 은신처 밖으로 고개를 내민 왈도파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1세의 무시무시한 “메링돌 체포령”에 접하게 되었다. 1545년 4월 18일, 메링돌과 뤼베롱에서 가톨릭 왕군이 수많은 마을을 박살내면서 저지른 학살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악랄한 폭력이다.
처참한 살륙은 110년 후 “피의 봄”이라 불리는 대학살로 다시 반복되었다. 1655년 4월 24일, 사부와 공국이 피에몽 계곡에서 왈도파를 무참히 살육한 방식은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가공할 악행이었다. 겨우 몸을 건져 위그노 우호지역으로 피신했던 왈도파 가운데 일부가 후일 삐에몽 계곡으로 돌아와 작지만 탄탄한 공동체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