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선교 여행기 4] 일본에 울려 퍼지는 풍금소리 4_박병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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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울려 퍼지는 풍금소리 4

박병화 목사(부천 상동21세기 교회, 증경총회장)

 

운펜지 사찰의 소원 종이들

 

12월 1일(목)

매월 1일부터 9일까지는 아침금식이라 오늘은 식사하러 내려가지 않았다. 오늘도 새벽 3시부터 일어나 기도하고 어제 하루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였다. 아침 8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거의 한 시간을 달려서 운펜지(雲辺寺) 산정공원에 도착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900미터를 올라가니 금방 산 정상에 이를 수가 있었다. 약1,200년 전에 시코쿠에는 쿠가이(홍법대사)라는 이름의 유명한 승려가 불교를 포교하고 있었다.

그는 젠츠지라는 사찰의 주지이면서 시쿠코에 있는 88개의 사찰을 순회하며 포교에 힘썼다. 그것을 일본에서는 ‘오헨로’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오헨로 순례를 하고 있다. 운펜지는 88개의 사찰 중에서 66번째 사찰로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카가와현, 에히메현, 도쿠시마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운펜지에는 홍법대사가 엄선한 88개의 절을 판화로 제작한 것을 사진을 찍어 붙여 놓았다. 지금 시코쿠 사람들에게 홍법대사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고 있다. 산위에 올라오니 기온이 산 아래보다 10도는 내려갔다. 고드름이 얼려 있었으며 한기가 많이 느껴졌다.

시코쿠에는 우리 한국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두 명의 일본인 크리스찬이 있다. 한 명은 한국에 온 최초의 일본 선교사인 노리마츠 마사야스(乗松雅休)목사이다. 시코쿠 에히메현 마츠야마성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노리마츠 목사는 고향을 떠나 요코하마로 가서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하숙집 여주인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는 일본 최초의 개신교회인 요코하마해안교회를 다니면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얼마 후에 공무원을 그만두고 메이지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일본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전도를 하던 중에 우연히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박영효를 만나면서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노리마츠 목사는 1895년 명성왕후가 일본낭인들에게 피살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아 한국에 사죄할 마음과 복음을 전할 각오로 1897년11월 27일에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 땅에 입국하였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수원에서 올라온 어떤 사람이 수원에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899년 사토 여사와 결혼한 그에게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다. 1900년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걸어서 수원으로 이사를 해서 1914년까지 수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노리마츠 목사는 옷이며 먹는 음식이며 주택이며 모든 것을 조선 사람들과 똑같이 하였고 자녀들에게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너무도 생활이 궁핍하여 어떤 때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생활할 정도였다. 그러나 굶주리고 먹지 못하는 조선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밥을 먹여서 보냈다. 그러다가 제대로 먹지 못하던 사토여사는 1907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아내를 잃은 노리마츠 목사는 1914년 일본으로 돌아간 뒤 재혼을 하고 다시 한국에 나왔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역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노리마츠 목사하면 수원에 있는 우리 합신총회세계선교회(HIS) 본부 바로 옆에 있는 수원동신교회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리마츠 목사가 1897년에 개척한 교회이다. 현재 그의 유골은 아내와 함께 동신교회 정원에 묻혀 있다. 노리마츠 목사는 플리머스형제단이라는 작은 그룹에 속한 선교사로서 그 그룹의  표어인 “수치는 우리에게,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정신을 좇아서 살았다.

또 한명은 다우지 지츠꼬(한국명, 윤학자) 여사이다. 윤학자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서 여학교를 다니며 고아 구제시설인 목포공생원에서 봉사하다가 원장인 윤치호전도사와 결혼하고 3000명의 목포 고아를 돌보았다. 윤학자 여사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이 있던 날 목포 시민 3만명이 참석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윤학자 여사의 고향은 일본 시코쿠(四国) 최남단 고치현(高知県)이다. 허태성 선교사가 선교하는 시코쿠는 한국을 위한 위대한 두 인물을 배출한 지역이다. 현재 한국 주소가 수원으로 되어 있는 허태성 선교사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사역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시코쿠 출신 노리마츠 목사는 수원에서 선교하였는데, 자신은 수원 사람으로서 시코쿠에 들어와서 선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허선교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운펜지를 구경하는 중에 한 곳에 가니까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열거되어 있는 표지판이 있었다. 그것에 대하여 박성주 선교사가 설명해 주기를 ‘이런 나이를 가지고 있으면 아주 운세가 안 좋으니 조심하라’ 는 표지라고 했다. 그러니 어서 속히 절에 와서 기도를 하라는 것이란다. 절간 한곳에 가니 100엔을 넣으면 운세가 나오는 시설도 있었다. 그런데 운세가 나쁘면 그 운세가 적힌 흰 종이를 줄에 걸어놓았다가 연말이 되면 한곳에 모아 소각을 한다고 한다. 또 한 곳에 가니 100엔을 넣고 나온 흰 종이에 소원을 적어, 동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설치한 곳에 소원을 적은 것을 걸치고 두 번 들어갔다 나오면 액운을 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500엔에 산 나무에 소원을 적어서 걸어놓으면 더 빨리 잘 응답이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는 흔히 ‘800만의 신’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신의 숫자를 세어보니 800만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이 셀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많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신사들이 있는데 각 신사마다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신사에 가서 기도하면 지혜가 주어진다고 해서 학생들이나 그 부모가 그곳으로 여행을 오기도 하고 시험 때가 되면 학생들이 줄을 서서 이 신사를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신사 안에서 한 스님이 부채 같은 것으로 부쳐주면 지혜가 온다하여 줄을 서서 돈을 내고 그 효험을 누릴 수 있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그 바람을 간접적으로라도 씌어 보려고 주변에 서 있단다. 소위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겠다는 것인가? 참으로 일본인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허태성 선교사님이 동경에서 지낼 때 크리스천의 무덤에 몇 차례 가보았는데, 비석에 적힌 내용을 보면 그렇게 은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새겨 놓은 성구가 빌립보서 3장 20절이라고 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죽은 사람의 무덤 패션도 다양하다고 했다. 부자여서 돈을 많이 낸 사람들의 무덤은 크고 화려하지만 가난해서 많은 돈을 낼 수 없는 일반 서민들의 것은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다고 했다. 세상에서는 죽어도 돈 때문에 차이가 난다.

또 한곳에 가니 사람들이 긴 줄을 잡아 당겨서 종을 치고 있었다. 종소리로 신을 깨우는 것이란다. 잠든 신을 깨워서 자신의 소원을 말한다고 하니 과연 그 신이 얼마나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독교와 세상 종교와의 차이이다. 세상종교는 내가 신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가 죄인임을 안다.

세상 종교는 내가 신을 찾아간다. 그러나 기독교는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세상 종교는 잠자는 신을 깨운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지켜주신다. 세상 종교는 내가 깨닫는 자가 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나 기독교는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일본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공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료로 무엇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긴장을 하고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기독교는 우리의 구원부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공짜인데 일본인들 문화 속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펜지에서 내려온 후에 우리는 바닷가에 위치한 온천으로 갔다. 식당과 함께 있는 온천이라 먼저 바닷가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나서 온천욕을 즐겼다. 그리고 사모들은 YOU ME TOWN이라는 대형 쇼핑몰에서 상가를 둘러보며 필요한 것을 사려고 했지만 대부분 빈손으로 아이쇼핑을 하는 데 그쳤다.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은 차를 마시며 우리 교단과 합동신학교가 당면한 현안 문제들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문제점과 해결방안 등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코리아 하우스’라는 한인식당으로 이동해서 삼계탕과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일본에 온지 25년이 되었다는 주인 부부는 우리에게 정성을 다하여 풍성한 식탁을 준비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번 일정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허태성 선교사님은 60이 넘어 일본에 선교차 오면서 허드슨 테일러나 WEC 선교단체처럼 훼이스 미션(Faith MIssion)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그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지 말자고 다짐하고 기도만 했더니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시더라고 간증을 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살다보니 차가 필요하더라는 것이었다. 차를 구입하려고 계산해 보니 적어도  5, 6년 동안 생활비를 아껴 쓰며 저축을 하여야 작은 차라도 구입할 수가 있었다고 했다. 아니면 한국교회에 차량구입비를 후원해 달라고 요청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어학교를 졸업하던 날, 박성주 선교사님으로부터 차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공짜로 차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손길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현재 일본에는 약1,500여명의 한국인 선교사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300명 정도만 일본인교회 교단에 들어가서 일본인 사역을 하고 나머지는 교포사역을 위주로 하면서 일본 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태성선교사님은 고백하기를, 만노교회 교인들은 만노교회에 너무나 과분한 목사가 왔다고 좋아하면서도 죄송스러워하지만, 반대로 허태성 선교사님은 일본에 온지 3년 6개월 만에 나같은 사람이 일본장로교회에 속한 만노교회에 주임목사로 부임하여 교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목회하게 된 것을 과분한 사랑과 주님의 은혜라며, 만노교회야말로 자신에게 과분한 교회라고 진심어린 고백을 하였다.

허태성 선교사님은 일본복음선교회(대표 이수구 목사)에서 선교훈련을 받을 때 강사로 온 히로시마개혁파교회 신성일 선교사님이 권면한 말 3가지를 늘 기억하며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첫째,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려는 자세를 항상 가지라. 둘째, 선교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일본인들과 친구가 되라. 셋째, 강단에서 설교할 때 가르치기 보다는 나눈다는 자세로 말하라. 그 야야기를 듣고 있던 박성주 선교사님이 말했다. 26년 동안 일본에서 선교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선교사들이 자꾸 가르치려고 하다가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렇게 했는데 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그러자 허태성 선교사님이 한마디 하기를 만노교회를 시무하면서 모르는 것은 자꾸 박성주선교사님에게 물어 본다고 했다.

허태성 선교사님은, 30년 이상 된 베테랑 선배 선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들려주었다.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을 때는 설교가 은혜가 되고 선교열매가 있었는데 말을 유창하게 잘하게 되고 나니까 성도들이 받는 은혜가 예전만 못 하고 전도의 열매도 적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일본어가 서툴러서 잘 알지 못하는 일본어로 설교문을 작성하여 설교를 하려고 하니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 와서 한 주간 동안 지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두 분 선교사님과 목사님들 그리고 참석한 사모님들이 차례대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무리 모임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고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내일 아침에는 식사를 더 빨리 하고 7시 30분에 공항을 향해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 숙소로 돌아와서 오늘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일본에서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번 일본 선교지 방문은 모든 것이 다 은혜로 가득한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