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1-8,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최용철 목사(유천교회, 강원노회장)
오늘 말씀은 노아홍수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이유에 대하여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타락이후에 구원의 씨앗으로 셋 계열의 경건한 혈통을 두신다. 이 계보 속에 아담의 7대손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이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이다. 이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300년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다. 그리고 869년쯤의 세월이 흘렀고 그의 손자 노아는 500세가 되어 셈, 함, 야벳을 낳는다.
6장은 이즈음에 세상이 번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명이 꽃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인의 4대손 라멕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에게서부터 시작된 인간이 주인 되는 세상의 문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하나님의 경건한 자손들 마져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심판의 메시지를 잊고 세상 문화에 매료되어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이제 경건한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약속은 불편한 진실이 되어버린다. 여기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지점이. 하나님은 세상을 바라보실 그의 백성을 중심으로 바라보신다. 그들의 나의 언약을 잘 준행하나 그렇지 않나가 세상을 다루시는 기준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세상의 모든 희망은 사라진다. 그의 백성의 인식체계 속에서 ‘그가 죽으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계시가 지워져 버린 것이다. 계시의 빛 아래서 세상을 조망하고 사건을 해석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빛이 사라지고 소금이 맛을 잃은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육체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 은혜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잃는 것과는 비교 할 수 없는 만큼 크고 두려운 일이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이 세상의 근본적인 성격을 규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해 놓은 역사의 궁극적 성격이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어야만 한다. 베드로는 심판아래 놓인 세상에 대해 ‘본래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성격을 규정해 놓고 있다. 이 세상은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더욱이 인류가 진보되어 유토피아가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헛된 바램일 뿐이다. 이 점에서는 어떤 낙관론도 없다.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은 누구도 변경할 수 없다. 우리 인생은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다고 아무리 아우성쳐 봐야 소용없다. 그분은 그분 뜻대로 하신다. 그분은 오직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하시고 일하신다. 그리고 여기에 승복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그 중에 남은 자가 있었으니 므두셀라의 손자인 노아라는 자이다. 그의 아버지 라멕은 ‘여호아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계시를 품고 하나님의 안식을 고대하며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을 만큼 경건한 자였고 또 경건한 후손을 낳았다. 노아를 성경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평가한다. 한마디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한다.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는 칭의로서의 의를 말한다. 이 칭의를 입은 노아는 입은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며 산 것이다. 그러한 노아의 삶은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방주를 건조하는 120년의 세월을 죽도록 충성하는 헌신의 삶 속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인내하며 살았다.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 노아의 삶은 어리석고 미치광이 같은 삶이었다. 그리고 방주를 완성했을 때에 그리로 들어가라는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여 자기 가족들과 함께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방주의 제작과 모든 설계와 재료까지로 빈틈없이 하나님의 명에 온전히 순종하였고, 방주를 완성하고 그 안에 채우는 짐승도 하나님의 명대로 그대로 순종하였다. 자기의 아이디어는 머리터럭 만큼도 개입시키지 않았다. 여기서 노아의 완전함, 의인됨, 하나님과 동행함이 무엇인지를 본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들어 수행하는 청지로서의 역할이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러한 노아를 통해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나 구원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도 이 사명으로 부름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고 빠져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진행시켜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불신자의 삶이 아니라 신자의 삶이다. 내 백성이 어떻게 하나 보고 계신다.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을 아는데 내 백성이 나를 모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지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자각이 먼저 선행 되어야 한다.
인생 고통의 근본적인 문제는 물질적, 정신적 결핍이나 소외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진노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계시다는데 있는 것이다. 인생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엉뚱한데서 원인을 찾으려하니 고통에서 벗어날 날이 없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데 있다. 보이지 않는 그 분이 인생의 영원한 운명을 정하신다. 그런데 그분께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면 끝난 것이다. 인생들의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멸하실 수 있는 그 분이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신다. 순결하신 그 분은 사람의 딸들과 간음한 자를 신부로 맞이하실 수가 없다. 우리도 노아의 때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성도들의 인식의 체계 속에서 지워 버리기에 충분한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 앞에 서 있다. 그 아름다움의 본질은 심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두려워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