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논단] 복음과 공공신학_황경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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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공공신학

황경철 목사 (CCC선교사, 조직신학 박사)

 

온 국민이 힘겨웠던 코로나 3년을 지나면서 한국교회의 역할과 현주소를 돌아보게 된다. 현장의 목회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하며 교회를 지키고자 애썼다. 그러나 문을 닫는 교회 수가 작년에만 수천 개에 이른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교회의 공적 책임과 공공신학에 대한 강조는 한국교회가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미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목회데이터연구소는 한국교회가 집중해야 할 1순위가 ‘자기 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교회의 공공성’이라고 개신교인 39%, 비개신교인 49%가 응답했다고 발표했다(2021년 1월 82호). 요점은 교회의 공공성 회복이 가장 큰 과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이 과연 성경이 명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세상의 요청이 강력해도 그것이 교회가 수행해야 할 본질적 사명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이 질문에 해답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적 관점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문화명령을 주셨다(창 1:28). 온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대리통치자로 세우신 것이다. 비록 아담의 범죄로 이 명령은 좌절되었지만,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성경에 면면히 나타난다. 새 집을 건축할 때, 난간 설치를 명하심으로 이웃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게 하셨다(신 22:8).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하신다(레 19:9-10). 경제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 외국인과 나그네를 배려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적 가치가 예배당 안에서만 아니라 공적 영역인 정치, 법정, 시장 등 사회 전반에서 구현되도록 명하셨다(삼하 8:15; 레 19:15; 잠 11:1).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윤리를 가르치심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초대하신다(마 5:16). 바울은 자신이 믿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당대의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학파들과 공개적으로 논증하였다(행 17:18). 바울은 성도의 믿음이 일상에서 드러나도록 가르쳤고(골 3:23),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이원론적 삶을 극복하도록 당부했으며(엡 4:13), 삶이 거룩한 예배가 되도록 촉구했다(롬 12:1). 성경은 분명 복음이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어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흘러가야 한다고 강조한다(암 5:24).

둘째, 역사적 관점이다.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74년 시카고 대학의 마틴 마티가 라인홀드 니버를 공공신학자로 평가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공공신학 개념이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신자들이 결혼과 가족이든, 사회적 관계든, 경제적 활동이든, 예술과 과학이든,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독특한 직업적 소명을 추구할 때,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은혜로운 통치가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면서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는 영역주권론을 강조했다. 카이퍼 자신이 일국의 수상으로, 신학교 총장으로, 당총재로, 언론인으로 살면서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몸소 실천하였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회심 체험 후 존 뉴튼 목사님의 조언을 따라 거듭난 정치인으로서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도 훌륭한 역사적 사례이다. 철저한 개혁신학적 입장은 아닐지라도, 나치에 저항한 본 훼퍼, 인종차별에 반대한 마틴 루터 킹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신학적 관점이다. 공공신학이 무엇인지 간략히 정의한다면,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교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믿기로 공공신학은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신학 사조나 사회 개혁을 주창하는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온 피조세계를 갱신한 회복과 재창조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고, 종말의 완성을 향해 질주한다. 성경이 가르치고, 역사속 교회들이 수행한 ‘복음의 총체성’을 ‘공공신학’으로 명명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의 주체는 교회입니다. 시민단체나 사회기관이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지상명령으로 영혼 구원을 분부하셨다. 동시에 구원 이후 문화명령을 실천하여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성숙하고 온전한 제자로 이끄신다. 여기서 공공신학의 자세를 발견한다. 교회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자기 부인과 희생을 솔선하고, 비신자의 언어로 소통함으로 공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인본주의적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히 인정하는 기독교적 증언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고, 세상은 교회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의 영광처럼 깨어지고 절망한 온 세상에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는 충만의 도구가 될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