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세 기둥
신자에게는 매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다. 신자는 날마다 예배하는 삶을 실천한다. 평일도 예배일이다. 하루하루가 예배의 날이기에 중대한 가치를 가진다. 이 때문에 신자는 주중의 시간을 헛되지 보내지 않는다. 구약의 가르침을 따르면 엿새의 삶에 충실하지 않을 때 안식일 준수의 의미가 퇴색하듯이, 우리에게도 주중의 삶에 충실하지 않으면 주일 지킴의 가치가 희석된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엿새가 안식일을 향하여 모아지듯이, 우리에게는 주간이 주일을 향하여 모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나날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실천하면서도, 주일에는 지역교회의 모든 교우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에 주력한다. 예배가 집중되는 것은 주일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모든 신자가 함께 모이는 예배의 중요성을 최대한 강조한다. 초대교회는 다각적으로 박해를 받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유대종교는 처음부터 대놓고 교회에 발길질을 하였고, 로마제국은 기독교에 점차 강도 높은 혐오감을 드러냈고, 이방세계는 곳곳에 복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초대교회는 모이는 예배를 끈질기게 지속하였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예배 현장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고, 예배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설교, 현실을 예리하게 아뢰는 기도, 신학에 탄탄한 바탕을 둔 찬송, 신자 됨과 신자임을 고백하는 성례가 있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가 한참 흘러 다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예배하기를 추구하던 개혁파 교회는 예배의 형식에 중요한 세 기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다. 이 세 가지는 중세 후기에 교리문답을 전개할 때 곧잘 기본적인 틀로 활용되었고, 후에는 종교개혁자들도 그대로 답습하였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의 대교리문답서나 요한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이 구조를 따랐다. 많은 부분 칼빈의 신학에 빚지고 있는 개혁파 교회에서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예배의 형식을 붙잡아주는 세 기둥으로 여겨지면서 개혁파 예배의 특징을 이루었다. 지금도 베를린의 프랑스인 교회 같은 교회들이 여기저기에서 이 예배모범을 잘 이행하고 있다.
십계명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에서 멀어진 문제를 짚어보게 한다. 우리는 십계명을 암송하거나 낭독할 때 하나님의 요구와 달리 세상의 정신을 따라 살았던 것을 회개한다. 성경을 요약하며 교리의 핵심을 담고 있는 사도신경은 암송과 낭독을 통해서 무엇을 믿는지 고백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바짝 다가가게 하는 감격을 불러일으킨다(어리석게도 사도신경은 성경에 자구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않기에 무가치하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주님이 받기를 기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우며 세상에서 살면서 기도하는 경건과 영적 생활에 힘쓸 것을 다짐한다. 이것이 예배의 세 기둥이 가져다주는 효과이다.
자주 우리는 형식을 강조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형식에 거부감을 가지는 까닭은 형식주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사실 형식주의가 교회에 심각한 폐해를 입혔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형식주의를 경계하기 때문에 형식 자체를 거부하는 생각은 옳지 않은 발상이다.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이 위험한 만큼 형식을 버리는 것도 위험하다. 오히려 교회가 예배 형식을 위해 일치된 모범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른 형식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흔쾌할 뿐 아니라 신자들이 드리기에 합당한 예배를 진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예배의 세 기둥으로 갖춘 예배는 회개와 고백과 결단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신자를 결속시킨다.
오늘날 형식을 잃어버린 예배 현장이 즐비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배의 세 기둥 가운데 한 가지나 두 가지를 잃어버린 것은 고사하고 아예 세 가지를 모두 상실한 교회들도 있다. 귀에 들리는 변명은 이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새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외국인을 맞으려고 우리말을 지워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에서 예배의 전통도 찾아볼 수 없고 예배의 정통도 발견할 수 없다. 예배에 개념도 없고 철학도 없고 신학도 없다. 예배가 기둥을 잃어버려 뒤죽박죽이 되었다. 목회자도 회중도 모두 예배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