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마음을 향한 설교_고상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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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향한 설교

고상섭 목사(그 사랑교회, 본보 논설위원)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람의 마음을 정감과 감정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affection이라는 정감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단지 emotion이라는 감정에 변화만 일어날 때 은혜를 받는 것 같지만 삶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란 마음 깊은 곳에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인간의 정감은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만날 때 전인에서 흘러나오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는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아도 눈물을 흘리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마음 깊은 곳의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쌍한 아이들의 영상을 보고 구제헌금을 낼 수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물질주의라는 우상이 깨뜨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 깊은 곳의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이 깨뜨려지지 않는 나눔은 결국 마지막엔 자기중심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팀 켈러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보편적 미덕으로는 삶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만이 참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 13:20~21) 돌밭에 떨어져 열매 맺지 못하는 밭도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을 수’ 있다.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 가장 우선적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우상이라는 다른 가짜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기 때문에 참된 변화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겨냥해야 하는 지점은 눈물과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있는 우상이 깨뜨려지고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세워지는 지점이다.

또 우상을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근본적인 우상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다. <거짓 신들의 세상>에는 한 남자의 예가 등장한다. 대학시절 수많은 여자들을 만난 바람둥이였는데, 한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나면 식상해져서 또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그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 전도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행동은 변화되었지만 마음 깊은 곳의 우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수업시간에 때로는 논쟁적이었고, 남들을 지배해야 직성이 풀렸다. 회의 때마다 리더로 선정된 것은 아니지만 리더 역할을 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다. 무신론자들과 대화할 때도 공격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많은 여자들을 사귈 때도 여자들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면 누구와도 사귈 수 있다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기독교 전도 활동에 참여하고 싶었던 이유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이 옳고 진실을 알고 있음을 과시해 권력을 얻고 싶은 것이었다. 결국 그가 우상을 섬기는 권력이 성적 형태에서 종교적 형태로 바뀐 것뿐이었다. 이처럼 우상은 모습을 잘 숨긴다. 결국 단순히 전달되는 은혜로운 설교로는 심층에 깔려 있는 우상을 제거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통해서만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설교의 적용이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행위의 변화는 스스로를 더 종교적인 사람으로 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동기가 두려움이나 자존심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그 일을 하면 피해를 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행위의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참된 순종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람들을 위해 선택한다. 그래서 자신의 희생을 기뻐하며 더 큰 대의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

복음을 날마다 내 자신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한다. 복음을 통해 우리의 삶의 동기가 변화되지 않으면, 대부분의 행위적 노력은 자기 의로 끝을 맺게 된다. 주일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설교문을 읽으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이 드러나지 않으면, 은혜를 받아도 여전히 우상숭배를 강화할 수도 있게 된다. 매주 말씀을 선포하지만 여전히 마음의 우상을 더욱 섬기게 된다면 설교자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효율적인 삶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것, 그것만이 숨어 있는 심층적 우상을 깨뜨리고 사랑의 순서를 재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