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일치신조』에 나타난
행위언약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Formula Consensus Ecclesiarum Helveticarum, 1675)
이남규 교수(합신, 조직신학)
지난 합동측 총회와 고신측 총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연구를 해당 상비부에 위임하고 돌아오는 총회에서 다루기로 결정한 줄로 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최근 일부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문제는 이미 개혁교회 여러 총회들에서 다루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1603년 총회에서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는 자들을 정죄했고, 스위스 개혁교회는 이미 1588년 총회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가르쳤으며,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앙고백서(22항)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지지하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는 일은 개혁교회의 고백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 장로교회 일부에서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는 주장의 특징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만이 아니라 행위언약과 아담의 첫 상태에 대해서도 개혁신학의 전통적 견해와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뮈르 학파의 아미로의 사상을 정죄했던 1675년의 『스위스 일치신조』를 살피는 것이 의미있을 것이다.
『스위스 일치신조』(1675년)는 현대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통개혁신학과 다른 입장에 있었던 소뮈르의 세 교수(카펠, 플레이스, 아미로)의 신학사상의 문제점을 다룬다. 이 신조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훼손했던 카펠에 맞서 성경의 축자 영감과 권위를 고백한다(1-3항). 하나님이 믿음을 조건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의도했었다는 아미로에 반대하여 본래부터 그리스도가 택함받은 자들의 구원을 의도해서 죽으셨다고 고백한다(4-6항, 13-14항). 아미로에 반대하여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이 약속된 행위언약이 있었다고 고백한다(7-9항). 플레이스가 아담의 원죄의 직접전가를 거절하고 간접전가를 주장한 것에 맞서, 직접전가설을 고백한다(10-12항). 아미로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한다(15-16항). 아미로에 반대하여 성령의 부르심이 선택받은 자에게만 있으며 인간은 무능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17-22항). 아미로에 반대하여 언약의 통일성을 고백한다(23-24항). 스위스 신앙고백서와 도르트신경을 인정한다(25항).
여기서 다루는 주제와 관련지어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7항에서 9항까지 행위언약에 관한 내용과 함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다. 그리고 15항과 16항에서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고백한다. 이 글은 1675년에 고백되는 내용이 종교개혁가 칼빈의 관점과 비교하여서 얼마나 지속적인지 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비교하여서 개혁교회 간에 얼마나 공통적인지 살펴볼 것이다.
1) 행위언약에서 약속된 상급과 타락전 아담의 상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 즉 행위언약을 다루는 7항부터 보면, 하나님이 이 행위언약 안에서,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생명을 누릴 것을 약속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약속된 이 생명은 단순히 이 땅의 생명과 복의 지속이 아니라, 천상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8항). 『스위스 일치신조』는 바로 이 점에서 아미로를 반대한다. 아미로는 타락전 아담과 맺은 언약에서 약속된 내용이 천상의 삶이 아니라 지상의 삶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8항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키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것을 생명나무만이 아담에게 예표한 것이 아니다. 또한 율법의 능력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고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천상의 삶을 우리에게 확실히 말한다.
여기서 이미 우리를 대신하여 완성하시고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천상의 삶이 있다. 그래서 9항에 가면, 단지 지상낙원에서 생명을 계속해서 누리는 것이 행위 언약의 약속이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저들은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그가 받았을 천상의 복의 상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또 저들이 행위언약의 약속으로 인정하는 것은 지속되는 생명 그리고 순결한 본성의 상태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어울릴 모든 종류의 넘치는 선으로 풍요로우며 지상 낙원에서 즐거워하는 생명일 뿐이고, 저들은 그 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건전한 이해와 부딪히며 그 자체로 고려되는 율법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여기서 스위스 개혁교회가 거절하는 아미로의 주장이 나오는데, 곧 아담이 지속적인 지상 낙원의 삶을 약속받았다는 주장이다. 반면 스위스 개혁교회는 아담이 순종을 조건으로 천상의 복의 상이 약속되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스위스 개혁교회는 지상 낙원의 지속적 삶을 상급으로 주장한 아미로의 사상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살펴보자. 17세기 스위스 개혁교회가 아담이 순종을 통해 천상의 복을 향해 나아가야 했었다는 고백은 16세기 칼빈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먼저 칼빈은 아담을 완전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칼빈은 고린도전서 15:45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5에서 이 살아있는 영과 살리는 영을 대조한다. 살리는 영은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전달하신다. 이것은 아담의 인격 안에 인간의 절대적 신분이 없음을 가르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우리가 하늘의 삶을 위하여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택이다. 그런데 타락 전 아담의 삶은 오직 땅에 있었다. 왜냐하면 견고하며 고정된 불변성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CO 23:36).
칼빈에 의하면 아담에게 절대적 신분이 없으며 아담은 하늘의 삶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담은 땅의 삶을 살았으며 고정된 불변성을 소유하지 못했다. 하늘의 삶과 고정된 불변성은 그리스도의 은택으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아담은 지상의 삶을 살았으나 하늘을 지향해야 했다.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땅의 거주자로 정해졌으니 이는 여기서 시간의 삶을 살면서 하늘의 영광을 묵상하기 위함이다”(CO 23:37). 아담에 대한 이런 묘사는 아담이 더 나은 삶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모습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칼빈에 의하면, 아담은 자신의 자유의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무흠(integritas)에 머무름으로 말미암아 더 나은 삶에 나아가야 했다. “이러한 순전한 상태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자유의지로써 영생에 도달할 능력이 있었다”(CO 2:143) “땅의 생명이 그에게 일시적이었을 것이고, 죽음없이 무사히 하늘로 옮겨갔을 것이다”(CO 23:45). “그가 무흠에 있었더라면, 첫 사람은 더 나은 생명으로 넘어갔을 것이다”(CO 23:77). 따라서 “순전한 상태”에서 “영생”으로, “땅의 삶”에서 “하늘의 삶”으로, “더 나은 삶으로” 옮겨가야 했다는 것이 칼빈의 의견이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일치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은 무죄한 상태의 인간을 선했다고 말하며, 동시에 가변적이었다고 말한다. 타락전 아담은 선했으나 그 선에 고정된 상태는 아니었고, “가변적” 이었다. 이런 인간의 의지는 영광의 상태에서만 “완전히 불가변적으로 자유롭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5항).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담의 첫 상태인 무죄의 상태와 우리가 이르게 될 영광의 상태를 구분한다. 이 둘의 구분을 없앤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아담의 첫 상태라는 것인데, 성경은 여기에 반대한다(고전 15:47). 칼빈도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은혜로 회복되되 단지 최초의 상태, 즉 우리 조상 아담의 순전함으로가 아니라 훨씬 더 좋고 탁월한 상태-우리가 천사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의 동료가 되는 것-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읍시다”(『창세기설교1』, 박건택 역, 2019: 296).
2)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아미로는 나아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했다. 8항에서 확인한 것처럼 스위스 개혁교회는 아미로에 반대해서 아담에게 주어질 상급이 천상의 삶이었으며, 이 천상의 삶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음을 고백했다. 스위스 개혁교회는 아미로의 주장에 논박하면서 능동적 순종을 변증하며 고백한다. 15항은 행하심으로써(agendo, 능동적으로) 또 당하심으로써(patiendo, 수동적으로) 성취하신 일이 순종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15항은 능동적 순종의 전가와 수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고백한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자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죽으심의 순종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만족시키셨으니 저 의로운 종으로서 행하심으로써(agendo, 능동적으로) 당하심으로써(patiendo, 수동적으로) 자신의 전체 생애의 여정에서 율법을 따라 성취하신 모든 순종이 그의 대리적인 의와 순종에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증언(빌 2:8 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생애란 가장 낮은 단계까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점진적으로 나아가며 계속해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시며 복종하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도 그리스도가 지극히 거룩한 생애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의를 만족시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 치르신 그 값이 고난만이 아니라 율법에 합한 그의 전체 생애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피에 우리의 구속을 돌리는 것은 그가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아니다. 이 마지막 행하심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이 행하심은 모든 능력의 가장 밝은 거울인데, 앞서 있던 삶을 죽음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면서, 이 가장 마지막의 지극히 고귀한 행하심으로부터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조항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얻으신 의와 순종이 무엇인지 다룬다. 수동적 순종 즉 당하심으로써 율법을 따라 성취하신 순종만이 포함되는지, 아니면 능동적 순종 즉 행하심으로써 율법을 따라 성취하신 순종도 포함되는지이다. 이 조항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순종만이 아니라 행하신 순종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흥미로운 표현은 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칭하면서 첫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순종이라고 하며 이 순종을 뒷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생애의 여정을 통한 순종이라고 부른다. 즉, 그리스도의 전체 생애의 여정을 통한 순종이 바로 죽음의 순종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미 처음부터 생애의 순종과 죽음의 순종은 같은 순종이며, 둘 중 하나가 능동적 순종이나 수동적 순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모두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포함한다.
그 근거는 사도의 증언과 성령의 말씀, 즉 성경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생애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이미 비하와 복종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그의 죽음과 분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의를 만족시키셨다. 그러므로 구속의 값은 고난만이 아니라 율법에 합한 그의 전체 생애다. 그러므로 율법에 합한 그의 전체 생애도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물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전체 생애도 우리의 구속을 위한 대속물이라면, 성경은 왜 우리의 구속을 그리스도의 피나 죽음에 돌리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사역은 “고난을 통하여 완성”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하심이 없이”는, 즉 십자가에서 피흘리심과 죽으심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스위스 일치신조는 그리스도의 피와 죽으심이 그리스도의 “모든 능력의 밝은 거울”로 칭한다. 피와 죽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을 가장 밝히 보여주는 용어라는 의미다. 성경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배타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나 죽음만을 의미하는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생애는 우리를 위해 치르신 값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죽음 앞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는 그의 죽으심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을 말할 때, 생애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16항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의를 분리하는 자들이라고 판단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수동적 의만을 전가하고 능동적 의는 전가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분명한 성경과 그리스도의 영광과 싸운다”라고 고백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의를 얻는 방식에 대하여 “그의 순종의 전체 여정으로”(toto obedientiae suae cursu)하였다고 말한다(Inst., 2.16.5).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 앞서 있던 내용이 우리의 의에 연결된다. 칼빈은 로마서 5:19의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할 순종이 율법의 한 부분에 관한 순종이 아니라 모든 부분의 절대적 순종(legis obedientiam numeris omnibus absolutam)이라 한다(CO 49:101). 갈라디아서 4: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으로” 율법에 복속하셨다고 함으로써 능동적 순종의 전가까지 함의했다. 나아가 설교에서 이렇게 분명히 가르쳤다.
나아가 우리가 또한 아는 것은, 그가 모든 종류의 순종을 완전히 성취하시려는 의도에서 율법에 복속하셨으니 마치 우리의 인격을 대신 하신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얻으신 의는 오늘 우리에게 허락되어 마치 우리 각자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드린 것과 같은 것이다(CO 28:342).
칼빈은 이렇게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복속하신 것이라 말한다. 또 우리가 앞서 살핀대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며, 아담이 지상의 삶에 제한되어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은택은 우리를 하늘의 삶으로 인도한다고 한다([창 2:7 주석], CO 23:3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1장에서 공의의 만족을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이미 고백한다. 나아가 7장으로 가면, 행위언약에서 아담이 완전한 순종의 조건을 이루지 못하고(3절)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 그리고 그분 자신을 드린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고 고백한다(5절). 대요리문답서에서도 도덕법이 생명을 약속함에 대하여 말한다(93문). 또 97문에 의하면 도덕법은 중생한 이들에게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선을 위하여 그것[도덕법]을 성취하시고 그것[도덕법]의 저주를 감당하신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많이 매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칼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스위스 일치신조(1675)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가르친다. 이성주의가 개혁교회에 들어왔을 때 성경의 영감과 권위와 선택교리만이 아니라 행위언약 교리와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 교리에도 상처를 입혔고 스위스 교회는 거대한 도전 앞에서 행위언약 교리와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 교리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빙크의 말대로 이 신조로도 이성주의의 거센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1, 1928: 165).
이 외에 더 자세한 논의는 곧 출간될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김병훈 외 저)를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