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특집 / 독후감] 성경을 통해 본 <어린 왕자>_황예진 청년

0
112

성경을 통해 본 <어린 왕자>

원문인용 : 『어린 왕자』(생텍쥐페리, 김석희 역, 열림원, 2020년)

황예진 청년(목은교회)

시작하며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읊어지는 작품(책)들이 많다. 그들을 통해 다양한 순간에서 적절한 명철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혜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모두 올바르다, 의에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 지식은 세속에서는 충분히 옳고 바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왜곡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지식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위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한다. 단순히 성도들은 지식과 명철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구원에 위한 지혜를 위해 읽어야 한다. 그를 위해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경을 모든 지식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나는 일반 서적을 성경을 통해 바라보기로 했다. 그 중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책 <어린 왕자>를 읽으며 어떤 점이 성경과 다르고 부족한지 혹은 어떻게 보충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았다. <어린 왕자>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작가 생텍쥐페리가 아이에 대해 묘사한 점. 둘째, 어린 왕자의 시선으로 보인 세상의 모습을 분석해보고 싶었다.

<어린 왕자>에는 다양한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은 매우 은유적, 상징적이다. <어린 왕자>의 별명인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명칭에 걸맞게 작가 생텍쥐페리는 명확히 하고자 하는 말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묘하며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분석되도록 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해석하며 열린 눈으로 각자에게 맞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린 왕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의 초상화를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려고 애쓸 테지만, 성공할 자신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그림은 꽤 닮게 그려질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그림은 조금도 닮지 않게 그려질 겁니다. (중략)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이럭저럭 다듬어 가겠지만, 결국은 훨씬 중요한 부분에서 실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점은 너그럽게 봐주기 바랍니다.

이 외에도 <어린 왕자>에 기록된 삽화마다 이 그림이 완벽히 정확하진 못하다고 꾸준히 언급한다. 필자의 <어린 왕자>에 대한 해석도 부족하고 틀릴 수 있다. 또한, 성경을 다 알지 못하는 나로서 세상의 지식도 완벽히 알 수 없다.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기독교적 소양을 기르며 세상의 지식을 성경의 눈으로 보는 공부를 하려 한다. 이 <어린 왕자>의 분석이 그 첫걸음이다.

어린 아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어린 왕자>가 독자들에게 가장 크게 일깨워 주는 점은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꿈을 꾸던 아이가 어른들의 몇 마디로 용기를 잃고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아이가 이익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상황을 조종사와 어린 왕자의 관계로 보여준다.

그 어른도 옛날 한때는 어린이였으니까, 그 어린이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군요. 어른들도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답니다.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지만요.) – 서문

작가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어른들도 한 때는 아이였다. 그렇기에 어린아이의 눈으로 볼 때 중요한 것, 어른들이 이상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제대로 알고 실천한다. 진실, 우정, 사랑, 공감, 포용, 희생, 용서 등 누구나 인생을 살며 중요하며 이보다 상위의 가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지킬 어른은 몇 명 없다. 친구와 함께 추억을 쌓기보다 친구보다 공부 잘 하기를 바라고 아이가 자신만의 미래를 꿈꾸기보다 수학, 문법 등을 공부해 세상에게 인정받기를 위하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며 점점 세속의 기준에 자신을 맞춰가고 자신만의 마음을 잃어간다.

동서양 철학에서 ‘아이’라는 존재가 지닌 메타포는 고지식함으로 굳어지지 않는 사고의 유연성이다. 모든 일들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발생했는지 궁금증을 가진다. 필연적으로 생긴 일들은 없으며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심을 가진 자가 세상을 더 크고 넓게 바라본다. 성경은 아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3-4)

어린 아이의 눈에는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세상의 기준은 별 것 없어 보인다. 세상의 기준이 의미 있을 때는 돈이 많아서 좋기보다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을 과자를 살 돈이 있어서 행복하고, 어른들이 우러러보는 명예보다 소중한 친구가 “넌 최고야” 해주는 칭찬 한 마디가 더 명예로울 것이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빌고,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기보다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그런 아이가 진정으로 천국에 갈 자라고 했다. 단순히 죄 유무를 떠나 천국 시민의 자질은 누구보다 아이 같은 자세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도 세상을 살다 보면 어린아이 시절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세상에 맞춰서 잃어버린다. 그런데 그걸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착각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잊고 세상에 물들여지는 것이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 3:1)

<어린 왕자>에서는 이런 어른의 모습을 모든 것을 혼동한다고 이야기한다.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며 그의 훈계를 듣고 몸에 새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어린 왕자가 만난 사람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작가가 바라본 사람들을 아마 상징적으로 인간의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작가의 시대를 보면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시민혁명을 성공하여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지식과 문화가 발전했다고 인정받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의 시민이 전쟁을 겪으며 피폐해지는 지식인, 욕망만 가득한 부유한 자, 무자비한 살생을 하는 군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만의 생각이 이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가 만난 사람들은 임금, 허영꾼, 술꾼, 장사꾼, 점등원, 지리학자 등이 있다. 어린 왕자는 이 사람들을 “굉장히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각자가 매우 특이하고 허무를 쫓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중에 임금을 눈여겨본다.

<어린 왕자>에 기록된 임금은 굉장히 특이하다. 임금이란 사람들을 지배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어린 왕자>의 임금은 본인이 지배할 수 있는 곳에만 명령한다. 그것도 일시적일 뿐이다. 시민이 반발하면 바로 말을 바꾸어 자신이 지배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아마 혁명이 성공하고 무의미해진 프랑스의 지배계층 혹은 왕족을 작가가 이렇게 표현한 것 같다.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왕 되신 자, 주님은 <어린 왕자>의 ‘임금’과 매우 다르신 분이시다. 마땅히 세상을 다스릴 분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사함과 용서를 주님께 구하며 구원 얻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것이 본인 의지대로 된다고 착각하고 사는 자는 무쓸모한 자이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사는 오만한 자이다. 천지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은 주님의 손길이 닿은 곳이다. 마땅히 세상에 유일하신 존재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라 억지로 권력을 모으려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하신 말씀에 마땅히 책임지고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마귀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얻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 품속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진정한 ‘왕’의 의미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어린 왕자>에서 어린 아이의 동심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이 세상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세상을 떠난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등장하여 알려준 말이다. 사실 어린 왕자는 단순히 세상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자신의 별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장미와 자신 둘의 관계의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왕자의 관심과 장미의 사랑이 서로에게 다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둘은 그 관계의 미묘함을 해결하지 못하고 어린 왕자가 별을 떠나는 것으로 장미의 이야기는 끝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여호와께 가장 경외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바로 주님의 크신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의 “사랑”은 일반 세속적인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사랑이다.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사랑, 가족 간의 또는 사람 사이의 사랑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큰 의미의 사랑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3:37~40)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어린 왕자와 장미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어린 왕자는 분명히 장미에게 책임감을 느꼈고 장미는 어린 왕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런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서로가 중요하다고 여길 수도 없다. 장미가 어린 왕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어린 왕자가 떠날 때였다. 어린 왕자가 장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장미를 떠난 후였다. 어린 왕자에 적힌 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정말 둘이 서로를 못 볼 때 깨달았으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으로 통하는 것, 바로 사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중요할 수 있을까. <어린 왕자> 책에는 보이지 않으니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들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첫 번째로 조종사와 어린 왕자가 처음 만났을 때 어린 왕자는 조종사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한다. 그러나 조종사의 양을 보며 어린 왕자는 병든 양, 염소, 피곤한 양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거절한다. 그러나 결국 상자 그림을 보며 그 안에 원하는 양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 받아들인다. 두 번째로 어린 왕자의 별을 설명하면서 의복을 차려 입지 않은 터키인이 별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옷을 갖춰 입자 모두가 그의 말을 들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활주로가 없으면 날지도 못하는 비행기를 활주로가 없는 사막 가운데서 고치며 어린 왕자의 말을 무시하는 조종사의 모습이 있다. 이 모든 것이 각자가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상상하기 때문에 나타난 모습들이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자신이 단순한 그림이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아무리 중요한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그 말보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사례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사례가 다른 듯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안 보인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어린 아이의 눈을 여기서 재설명하자면 어린 아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안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눈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속의 눈으로 바라보면 말도 안 되고 허무한 말들이 많다. 예를 들면 원수를 용서하거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미는 것은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백성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는 왕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옳다고 하신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안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회개가 진정으로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좇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의존해서 그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며

성경을 통해 작품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렵고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아직 좁고 부족한 시각이지만 성경을 읽으며 제대로 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더욱 의미 있었다.

<어린 왕자>를 보면 바오밥나무 새싹과 작은 식물의 새싹을 구별할 수 없어 가만히 두면 바오밥나무 새싹이 매우 커져 별을 삼켜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일지 마귀의 말일지 마음속에는 항상 두 가지가 공존한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믿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마귀에게 시험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항상 경계하고 기도해야 한다. 사소하다고 한번 세상에 흘러가면 어느 순간 겉잡을 수 없이 우리의 주도권을 세속에 빼앗기고 만다. 순식간에 별을 지배해버린 바오밥나무처럼 말이다.

어린 왕자에게는 뱀과 여우가 나타나 각각 조언을 해준다. 여우는 어린 왕자를 사랑했기에 어린 왕자의 사랑을 바라며 보내주었고 뱀은 어린 왕자의 사랑을 이용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세상에도 마찬가지이다. 뱀 같은 조언도 여우같은 조언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여우인지 뱀인지 잘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바로 하나님 말씀에 의존해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말씀이 근본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기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