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밖 정자나무처럼 큰 나무가 되어
변세권 목사(온유한 교회)
신령한 삶을 즐거워하고, 활성화시키며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이 신앙의 정형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우리는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그나마 정부 방역지침의 큰 틀을 따르며 주일예배만큼은 중단됨 없이, 최소한의 신자라도 예배드릴 수 있도록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다행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앙의 형편을 살펴야 한다. “지금 나의 인생은 과연 무엇을 목표로 나가고 있는가?”를 생활 속에서 늘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은 그리스도의 생명활동을 세상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위클리프, 후스,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기타 등등의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순종하여,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 35)라고 하신 대로 살아 냈다. 그러자 “개혁된 교회”가 우뚝 솟아났다. 개혁자들 개인적으로도 사역 전체로도 이 사실은 선명했다.
그로써 초대교회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로의 변질된 질식 상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교회다운 품격을 온전히 드러냈다. 교회는 세상이라는 국권조직을 상대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국권조직을 제대로 드러낸 데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로 1500여년 만에 이루어진 쾌거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마침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라고 한 삶이 열매를 맺었다.
신자가 그런 내공을 갖추면, 교회의 생명활동이기에 세상의 핍박에도 기꺼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능력을 발휘한다. 세상은 한 개인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상과 굳은 절개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런 교회들이 전 세계적으로(보편성), 하나님 나라의 일치된 모습으로 나가면(통일성), 세상과 분리된 특성을 확연히 드러낸다(거룩성). 교회의 의연함에 세상은 기가 꺾이고 부끄러움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관을 토대로 인생 전체 속에서 하나님 나라적 활동을 이해해야 한다. 특별한 상황에서 미루어 온 숙제를 일거에 해치운다거나, 미래의 보상을 바라며 한바탕 투자하듯 과잉된 신앙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나의 인생은 과연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가 요점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새 생명답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자기 생애 전체를 통해 꾸준히 자라 가는 생명활동이어야 한다. 신령한 삶을 즐거워하고, 활성화시키며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정형이다. 결국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자세가 확고부동해야 한다. 교회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알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 32)라고 하신 말씀으로써 보증하셨듯이, 왜소하다고 위축될 필요 없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에 최선을 다해 나가면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은, 분수에 지나친 욕심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시키는 시험에 들지 않는 일이다. 교회란 각 지역 각각의 환경에 걸맞은 사명이 있고, 그것의 성격과 분량도 다르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나라로서 나아가야 할 성격과 정도를 충분히 알려 주셨다. 그러나 각 지역 교회들이 저마다 개별적 큰 목표를 두고 성취하기보다 기본적 사명에라도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교회가 자기 분량대로 하나님의 생명활동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의 총괄적 섭리하심으로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비상의 장엄함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게 전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전염병으로 우리의 존재 가치가 무기력해지기 쉬운 시절이다. 모두가 길을 헤맬 때, 우리는 동구 밖 정자나무처럼 누군가에게 그늘도 되고, 초록향기 바람도 되고, 쉼터도 되어 주며 늘 푸르게 힘을 내어 다시 도전하며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