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특집 / 여름에 만나는 겨울 이야기 ] 야성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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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외침 The Call of the Wild
– 잭 런던 (Jack London) 작. 1903

“알래스카 설원에 드리운 몽둥이와 송곳니의 법칙”

웬델 마이너의 삽화

<야성의 외침, 잭 런던 작, 정회성 역, 웅진닷컴 2003>

 

잭 런던 (Jack London, 1876-1916)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한 그는 불우한 유년을 보냈다. 일찍 직업전선에서 생계를 책임졌고 신문배달, 얼음배달, 통조림 공장 직원, 볼링장 보조원, 부두 인부, 원양어선의 어부 등을 체험했다. 그러다 독학으로 고교 입학 후 1년 반 만에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중퇴했다.

1897년 캐나다 북쪽 알래스카 클론다이크에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간다. 이른바 골드러쉬(Gold Rush)의 시대. 그는 정작 금은 얻지 못했고 아메리카 최북 지방의 자연과 환경에 맞서 싸우는 인간을 경험하였다. 이는 여러 작품에 반영된다. 런던은 20세기 모험 소설 작가 중 최고로 인정받으며 미국 작가 중에 외국에 가장 많이 번역 소개되었다. <흰 송곳니><늑대개><바다 늑대> <강철 군화>등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사실 그는 불행하고 방황하는 인생이었지만 그가 1903년(27세)에 발표한
<야성의 외침>은 알래스카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을 성찰케 하는 절실한 교훈으로 그에게 세계적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했다. 그는 평범했던 개 <벅>이 인간들의 야수성 덕택에 오히려 본래의 야성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통해 세상 속의 힘의 논리, 인간의 본능적 탐욕과 광기와 잔인함을 고발했다. 그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탐욕을 버리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보여 주었다.

줄거리

주인공 개 <벅>은 남부 산타클라라 밸리의 양지바른 저택, 밀러 판사 집에서 귀족적이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4년이 지나고 캐나다 북서부에 금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썰매를 끄는 개들이 많이 필요하게 된다. 밀러 저택의 정원사 조수 매뉴얼은 벅을 몰래 팔아넘긴다. 그때부터 벅의 불행이 시작된다.

팔려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벅을 몽둥이로 길들인다. 벅은 이른바 <몽둥이와 송곳니의 법칙>을 알게 된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은 결코 이길 수 없고 그들에게 잘 순종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 또 같은 처지의 개들 사이에서도 송곳니가 날카로워 싸움을 잘하는 힘 있는 개가 이긴다는 힘과 폭력의 원리를 체득한다.

벅은 정부의 긴급한 공문서 배달 일을 하는 자에게 팔려 알래스카로 간다. 거기서 함께 썰매를 끄는 여러 개들을 만나 음식을 훔치거나 개들끼리 생존경쟁으로 서로 싸우면서 서서히 야성의 본능이 깨어난다. 나쁜 주인을 만나 죽을 위기 속에서 손턴이라는 착한 사람이 벅을 구해주고 새 주인이 된다. 손턴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동물친화적인 사람이라 벅을 무척 사랑해 준다. 벅도 손턴을 잘 따랐다. 손턴이 잘 먹이고 보호해 주면서 벅은 늑대와 같은 튼튼한 야성의 개로 점점 변해 간다.

손턴 일행이 금을 발견하게 된 어느 날 인디언들이 습격하여 손턴 일행을 무참히 죽이고 다 빼앗아 간다. 벅은 사랑하는 주인을 잃고 극도로 분노하고 복수하면서 야성이 온전히 깨어나 몽둥이를 든 사람을 두려워 않고 죽인다. 벅은 이제 무서울 것 없는 야성의 개가 되어 주변의 늑대들에게도 도전을 한다. 그리고 늑대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야생의 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벅은 인디언들에게 ‘유령개’라는 별명을 얻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생각들

이 책은 정밀한 철학적 소설은 아니며 단순히 동물 보호나 자연주의의 이상을 구현한 것도 아니다. 벅은 개도 늑대도 될 수 있는데 작가에 의하면 그건 인간에 달린 문제이다. 작가는 사실 개를 빌려 인간사를 다룬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 환경 속에서의 힘의 논리와 윤리적 타락을 거의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드라마 극본을 소설로 풀어놓은 듯한 생생한 현장 다큐 혹은 르포 같은 소설이다.

거기서 헐떡이는 알래스카 개와 인간의 탐욕의 타액, 울부짖음, 광기와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인간과 세상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독자는 마치 그 현장을 목도하는 듯한 쓰라린 아픔을 맛본다. 벅의 고통에 감정이입하면 우리 안의 탐욕과 폭력성과 부조리의 내막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

알래스카 같은 세상의 혹독한 추위를 녹이려면 손턴 정도의 윤리적 기본은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작품에는 골드러쉬의 절정에서 탐욕의 발아와 성장 과정, 그에 결부된 폭력과 비극적 결말까지, 죄의 테마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이는 인간 사회와 문명의 실상이다. 거기엔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비롯 조지 오웰의 <1984>에 그려진 문명의 부조리, 인간의 본성적 타락과 광기, 폭력의 내재성, 근현대의 모든 식민지 침탈, 전쟁과 독재와 학살과 폭력의 참상들이 포함돼 있다. 잭 런던은 시대와 체제를 막론한 인간의 죄와 탐욕, 황금만능 엘도라도 환상의 허망함을 고발한다.

인류 폭력의 역사는 창세기의 가인의 살인을 시작으로 끔찍하게 전개되었다. 심지어 그 자손 라멕은 살인을 미화하며 가인보다 더 세다고 자랑까지 한다. 이렇게 보면 인류사는 지금까지도 탐욕과 폭력과 광기와 힘의 논리로 엮인 역사이다. 그러나, 몽둥이와 송곳니의 법칙이 과연 마땅한 자연의 순리인가? 밀러 판사와 손턴을 제외하고는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거칠고 잔인하다는 점이 슬프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어서였다고는 하지만 지친 개들을 몽둥이로 끔찍하게 폭행하고 억지로 썰매를 끌게 하는 모습들은 가슴 아픈 대목이다. 벅은 평화롭고 순한 개였는데 인간 폭력에 대응한 반작용으로 점점 독해지고 사나워져 늑대 같은 본성이 깨어난다. 그래서 결국 야성으로 돌아간다.

물론 벅도 살아남기 위해 많은 개들, 늑대들과 싸우고 심지어 사람도 죽였으니 더 이상 순한 개는 아니다. 그런데 벅을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손턴과 같은 사람에게 계속 사랑받고 살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과 벅이 누린 야생의 자유에 대한 수긍이 묘하게 교차한다.

잭 런던은 많은 체험을 토대로 알래스카의 생생한 자연 속에서 마치 독자가 벅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해 준다. 그는 인간이 가야할 바른 길을 되묻는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이 작품을 남녀노소 깊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최근 2020년에 개봉한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콜 오브 와일드>를 본다면 금상첨화이다. 더불어, 1990년대에 나온 영화 <늑대개 White Fang> 시리즈도 잭 런던의 작품들에 기초한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