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문학 성찰의 실마리
박부민 시인(본보 편집국장)
기독교인 작가들은 예술 본연의 미적 기술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로운 융합을 위해 노력하며 좋은 삶과 작품으로 활동해야
한국 기독교문학을 성찰하면 ‘문학은 예술’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종교적 강박에 눌리는 느낌이다. 이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이원론적 편견에서도 비롯된다. 문학평론가 고 김우규 선생에게 들은 일화인데, 그가 신학생 시절 자신은 목회자보다는 문학인이 되겠다고 하자 담당 교수가 “자네 타락했구만”하고 면박을 주더라는 것이다. 예술은 경건을 방해하는 세속문화의 첨병이라는 이런 이원론적 문화관은 신앙의 틀로 잠재된 창조성을 누른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하나님의 통치는 종교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받아 아브라함 카이퍼가 영역주권을 설파한 후 한스 로크마커 같은 이들은 기독교 예술이 성경적이거나 신앙적 주제들만 다루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시어베르트도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다 포함한 것이 기독교 예술이라 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를 단조적 주제와 장조적 주제로 설명했다. 삶의 비관적 양상과 낙관적 양상, 즉 명암이 교차되는 삶의 총체적 일상이 기독교 예술의 주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프랭키 쉐퍼는 ‘창조성의 회복’에서 기독교회의 예술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빚은 정황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지적했다. “예술과 문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이 지닌 창조성의 아름다움과 같은 하나님의 선물들은 기독교 의식의 밑바닥에 내던져 버려졌고, 마치 비영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여겨져 철저히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다소 과격하지만 그의 말이 수긍되는 이유는 다수 기독교인들의 예술에 대한 낮은 인식의 실태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기독교적인 세상과 세속적인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분리는 단지 용어의 차이에 불과하다”면서 “예술에는 단 두 가지 종류, 즉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밖에 없다. 세속적인 예술 중에서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으며, 크리스천들이 하는 예술 중에서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고도 했다.
박이도 시인은 ‘한국 현대시와 기독교’에서 “주제나 소재주의의 기독교문학이란, 작품으로 성공 못했을 경우 포교적 메시지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점, 또 하나는 작품으로 일단 성공했다 하더라도 주제의식이나 소재 나열이 생경하여 문학성을 실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면서 ”문학적 의의를 특정 종교나, 계층적 대상에 둘 때 문학의 참 뜻은 소멸될 우려가 많다.“고 했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문학을 운위하고 창작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술로서의 문학성이며 이와 결부된 사상으로서의 기독교적 세계관과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이다. 최문자 시인은 ‘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사상의 상징적 해석’에서 “문학이란 결국은 미를 추구하는 예술성과, 삶에 대하여 어떤 의의와 의미를 주는 사상성이 다 같이 필수적이며, 또 이것이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룩할 때 좋은 문학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이런 균형미는 작가가 의도한다기보다는 무의식 속의 산물일 것이다. 앞서의 프랭키 쉐퍼도 “집을 짓는 사람을 위한 기독교적인 벽돌이 따로 없듯 기독교 예술이라는 것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일생에 걸친 작품들이 당신의 인격과 사상을 나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의식적이기보다는 잠재의식적으로 나타난다.”고까지 정확히 짚었다.
좋은 기독교 예술이란 작품을 기독교적인 틀에 억지로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창조성과 상상력을 통해 세상 속의 삶의 본질과 현상들을 통찰하며 즐기고 고민하거나 의미 있는 감성과 교훈을 발견해 미적 유익을 얻게 하는 창작이다. 창조성과 상상력은 예술의 방식과 가치를 구현하는 필수적 매개이다. 기독교문학은 바로 그 위에서 진행되고 논의돼야 한다.
창조성과 연관해 김윤환 시인은 ‘박목월 시에 나타난 모성 하나님’에서 문학과 신학의 만남을 논하며 “하나님의 예술가로서의 이미지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인격적 개념이요 창조적 영성의 근거”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노래하고 이해함으로써 더욱 새롭고 풍성한 나눔과 누림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목적에 부합하는 영성회복이 기독교문학의 가치”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골자는 창조성이다. 리런드 라이컨은 ’상상의 승리‘에서 기독교적 미학의 주요한 기반은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이고 더불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작을 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창조성이 발현되는 동력으로서 상상력을 말하고 “인간이 상상력의 소산을 기뻐하는 것은 곧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요 상상적 문학을 써낸다는 일은 곧 그 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창조하는 능력을 닮은 인간의 창조성은 이미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선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 작가가 익숙한 표면적 기독교적 소재를 넘어 인권과 환경과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까지 다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좋은 기독교문학인에게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조건이 그의 작품들을 편향적인 도그마에 현저히 복무시키는 데로 압박하진 않는다. 그는 좋은 작가이기를 원하는 것이지 단순한 기독교 홍보 작가를 지향하진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기독교문학가로서의 작가의 세계관과 예술관의 건전성을 담보하는 출발선이다. 그는 사람과 사물과 사건의 이면에 내재한 가치를 주어진 창조적 심미안을 작동하여 추출하고 표현하는 것이 본래적 예술의 좌표임을 잘 이해하는 예술가이다. 따라서 기독교인 문학가의 작품에 기독교적 가치나 향기와 의미들은 자연스레 배어 나온다. 의식적으로 작품에 기독교적 장치들을 배치하는 것은 몇몇 중세 미술과 상품화된 기독교 홍보적 작품들의 경우에서 보듯 자칫 창의성의 경화를 부른다.
진 에드워드 바이스2세도 “예술가에게 믿음이 더 많다고 해서 미학적인 오류나 작품의 질적 문제들이 정상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예술 작업은 명시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것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피조계의 일면을 표현하는 것이든 또는 소리나 색채나 형태를 추상적으로 새롭게 재배열한 것이든, 어떤 예술품이나 모두 창조되어 실존하는 것들의 일부이고 따라서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기독교적인 예술이 성경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소설이 반드시 회심 사건을 다룰 필요는 없다. 노래도 찬송가만 작곡할 이유가 없다. 사실 예술이 종교적인 것이 될수록 더욱 문제성 있는 예술이 되고 만다.”고 했다.
물론 기독교 복음을 상징화하여 작품화하고 성경의 이야기를 예술품으로 제작하여 표현하는 것은 개개인의 역량과 선택의 문제이다. 어느 경우든 관건은 미학적 질을 갖춘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는가이다. 그러나 사상을 설파하는 도구로서만 문학을 선택한다면 예술로서의 질적 가치보다 도그마와 프로퍼갠더의 틀에 갇히기 쉽다. 그 나름대로 의미와 유용성은 갖더라도 냉전시대의 이념문학처럼 시공간에 묶여 버린다. 다만, 도덕적 가치 중립의 작품들과는 달리 명백히 반기독교적, 비윤리적 사상을 부추기는 목적성 예술 작업과 작품들에까지 동조할 이유는 없다.
기독교인인 작가들은 창조성을 기반으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미(美), 추(醜), 쾌(快), 고(苦) 등의 모든 양상을 작품의 주제와 소재로 선정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본질을 왜곡 없이 보여주면서 인간과 창조 세계 안의 본래의 의미와 즐거움과 가치를 발견하고 감동을 자아내며 진지하게 고민토록 하여 삶에 대한 통찰력을 보편적으로 줄 수 있는 작품을 지향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자들이 정리했듯이 기독교적 세계관은 창조, 타락, 구속의 조망을 작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인간의 아름다움은 만물을 창조하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던 표현대로 생래적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상상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다. 나아가 기독교 예술은 그 미적 세계에서 죄로 타락한 인간의 비애와 고통의 현장인 삶의 정황들, 윤리적 세목들도 다룬다. 죽음과 고통을 말하더라도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회복될 본래적 가치들에 대한 소망과 생명의 질서를 함께 다룬다.
결국 좋은 기독교문학이란 그런 주제들을 내외면으로 지향하지만 그에 눌려버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창조성과 상상력과 표현력이 얼마나 자유롭고 세련된 예술적 가치를 지니며 작동하는가로 판별된다. 이후로도 기독교문학의 발전의 관건은 사상과 문학성의 조화이다. 기독교인인 작가가 평생 몸담은 기독교 신앙은 그의 일상과 작품들에 자연스레 배어 있지만 그것이 작품의 보편적 감동을 상쇄하거나 편견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그가 좋은 기독교 작가이자 동시에 일반적으로도 좋은 작가라는 증좌가 된다. 이는 모든 장르의 기독교인 예술가들이 필연 터득해야 할 자존적 길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삶으로나 작품으로나 더 좋은 작가로 발전하며 예술적 지평을 확장해 나가려는 의지와 실천과 결실이다. 더욱이 한국의 기독교인 작가들은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되 한국이라는 정황을 잘 반영하고 우리말의 조탁에도 힘써야 한다. 이를 통해 예술 본연의 미적 기술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로운 융합을 위해 노력하며 좋은 삶과 작품으로 부단히 활동해야 한다. 근래에 뜻 있는 기독교인 작가들이 이 방향으로 진력하며 성과를 내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문학의 전망은 밝다.
– 계간 <생명과문학> 창간호, 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