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윌리엄 바클레이 William Barclay (1907-1978)
부활절 신앙은 1년 중 어느 때만 아니라 그것에 근거해서 매일을 살며, 죽는 신앙
그는 다시 사셨다!
현대의 교회는 부활절 신앙을 부활절 때에만 생각한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부활과 내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활절 때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부활의 신앙을 노래한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부활절 때에만 거의 한정되어 있다.
이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우리는 주님의 날인 주일의 기원을 잊어버린 것이나 아닐까 생각된다. 유대 사람의 거룩한 날인 안식일은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창조하시기 위해 일하고 7일 만에 쉬신 것을 기념한 것이지만, 주님의 날인 주일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한 날인 것이다.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날이 바로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이야말로 교회의 별자리 중에서 가장 큰 별이었다. 부활은 모든 예배 및 모든 삶을 기초 짓는 유일한 영광에 찬 사실이었다. 이 중심적인 부활 신앙으로 우리는 쉬지 않고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부활절 신앙,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다시 사셔서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연히 모든 삶은 그의 앞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것, 우리가 혼자는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 없이 노력한다든가, 슬픔을 참는다든가, 유혹에 직면한다든가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등을 믿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맞대면할 수 있는 것은 부활절 신앙,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다. 살아서 죽고, 그리고 또한 영원히 사시는 분, 죽음을 정복하신 분을 친구로서 또는 동료로서 사귀는 것이 부활절 신앙이다. 이 세상의 생활에서 함께 계시는 분은 죽음에서도, 죽음 저편의 생활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는 것이다.
어느 작가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 작가는 아버지를 깨우기 위해 그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노인이 말하였다. “블라인드(덧문)을 열어다오. 아침 햇살을 볼 수 있게” 아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햇살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노인은 머리를 베개에 깊이 묻고서 숨을 거두었다. 죽음은 아침 해가 솟는 일이었던 것이다.
부활절 신앙은 1년 중 어느 시기에만 생각하는 일 없이, 그리스도인이 그것에 근거해서 매일을 살며, 그것에 근거해서 죽는(그마저도 다시 살기 위해서이지만), 그와 같은 신앙이어야만 한다.
– <윌리엄 바클레이, 그리스도인의 365일, 종로서적 198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