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코로나 시대, 기독교인의 눈으로 본 문화 저변 읽기 (2)_이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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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패러다임 속 예술인의 존재방식과 기독교 예술인의 자의식

이은숙 시인 (본보 문화부 객원기자)

 

크리스천 문화예술인들이 시대 속에 어떤 의식으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보여 줘야

“언택트 Un-tact, 불필요한 부담감을 줄이고 또 다른 생활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매너 있는 트렌드.” 얼마 전 네이버 한 매체 기사의 오프닝 메시지이다. 코로나 이후 ‘비대면 문화’가 대중에게 하나의 트렌드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각종 광고나 기사들이 마치 깜빡이는 신호등처럼 우리를 길들이는 듯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합리적인 삶, 가치 있는 삶, 매너 있는 삶의 기준’이 위와 같이 어떤 문화권 속에서 특정 시대 상황의 영향아래 때마다 달라지는 것이 단지 교과서적인 이론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삶에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시대’라는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합리적인 삶이란 ‘서로 부담을 줄 수 있는 만남을 피하고 거리두기 매너를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문화 속에서 생겨난 ‘합리성’에 대한 가치 기준의 변화인 것이다. 결국 인간이 말하는 ‘합리성’은 그 시대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계가 명백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인간이 내세우는 인본주의적 가치들이 얼마나 부실한 기준과 근거 위에 세워지는 것인지 직면할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 금방 변화되고 사장될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내는 모든 새로운 가치들이 하나님의 높은 관점으로 바라볼 때 한없이 볼품없는 것임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크리스천으로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을 유의미하게 돌아보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 예술인들은 이렇게 달라지는 가치의 변화들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기자는 거류민과 같이 살다 가는 이 땅에서 일순간 지나가는 문화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을 영원한 도성’ 장차 도래할 주님나라의 시민의식을 가지고 그 백성의 문화와 가치를 개혁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까뮈는 자신의 작품 <페스트>에서 전염병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삶을 페스트보다 더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페스트에 의해 지배당해 가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열렬하고 애타는 감정이나 사랑을 품을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이제 끝날 때가 되었는데.’라고 무덤덤하게 중얼거리곤 했다. 시민들은 차츰 페스트에 적응해가고 있었고,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류’(주인공)는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이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페스트』 中

까뮈는 페스트가 만들어낸 절망의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절망 그 자체보다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특히 크리스천 문화예술인들은 그 누구보다 시대의 흐름을 뒤집어 바라보고 역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를 위한 유의미한 물음들과 나름의 답변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과연 살아 있는 의식을 가진 문화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때 가슴이 서늘해진다.

앞선 기사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한 우리는 이전보다 더 소외와 단절의 악화일로를 향해가고 있으며 이러한 기로에서 현대인은 교감과 접촉에 목마른 병증의 시대를 살고 있던 터다. 사람보다 기계가 익숙해지는 시대에 그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설 자리를 잃어갈 뿐 아니라 대화도 어려워졌다. 인간에 의해 개편되어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언제나 그랬듯 부작용을 동반하므로 알 수 없는 신종 질환처럼 우리는 이상을 감지할 틈도 없이 유전자 변형 같은 변화들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문화계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 속에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며 나름대로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아무리 연로한 어르신이라 할지라도 일정한 수준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젊은 시절 느꼈던 해학은 이내 개그와 블랙 코미디 같은 장르에서 새롭게 표현되었다. 대중문화의 최첨단을 걷는 이 한국에도 조성진, 손열음과 같은 젊은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큰 인기와 더불어 그 예술성을 대중에게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모두 예술과 문화의 연속성, 가치불변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비대면 문화까지 더해지며 방역이 철저하게 지켜질수록 기존의 단절과 소외에서 오는 현대인의 고질적 병증은 오히려 악화되는 모순적인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예술계는 침체를 넘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대중은 절망이 낳은 문화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혹자는 on-tact라는 말로 접촉은 계속되고 있으며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접촉의 방식이 병증을 해결할 수 있는 참된 접촉이 될 수 있을 지는 우리가 당면한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화시킬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크리스천 문화예술인들이 시대 속에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매우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멸망해 가는 남유다의 요시야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타락한 문화 속에서 쇠락해가는 국운을 직면했지만 절망하지 않고 그 세대에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크리스천 문화예술인들의 사명이 마치 요시야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첨단의 칼날로 인간관계를 잘라내는 상황 속에서 이제 ‘코로나 시대’까지 더해졌다. 크리스천 예술인들의 사명감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낙담하며 휩쓸려 갈 때가 아니다. 검은 바다에 비추는 등대와 같이 세상을 이끌어갈 크리스천 문화리더를 세상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끝에는 주님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