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우리 함께 올바르게 되자 _ 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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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우리 함께 올바르게 되자

 

<변세권 목사 | 온유한교회 | 본보 논설위원>

 

교회로서의 본질과 가치를 향유, 발현하며
함께 올바르게 가려면 건전한 비판도 필요하다

 

‘목사는 진심을 말할 때가 아니라, 책임을 행할 때만이 훌륭해진다.’

달력으로는 가을이 되었는데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하다. 일부 교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한 정국에서 목사의 신분으로 교인들을 이끌고 애국운동을 한다고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고, 그로 인하여 전염병이 확산되는데 통로 역할을 했다고 계속 비판 받고 전체 교회가 그 부담을 함께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독자들과 필자의 정치적 견해를 떠나 우리 목회자들은 교회 이름을 달고 이런 집회에 참여하면 안 된다. 목회자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목회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복음전파에 결과적으로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늘 신중해야 한다.

신천지 때문에 함께 엮여 시달린 것도 모자라, 교회가 이런 일로 세상의 비판을 받아야 하겠는가! 그 신학이 올바르지 못한 결과이다. 목회자는 바른 신학이 자기의 정체성이다. 목사부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지 못하고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 정치를 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목사라는 이름으로 왜 세상 정치에 기웃거리는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목사직을 내려놓고 가서 전문 정치행위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만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라면 더 인문학적 상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러니 지금의 교회는 신학이 없고 교리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힘들지만 지금은 한국교회가 같이 욕을 먹고 올바른 개혁주의 신학으로 돌아가고, 그 과정을 꼭 마련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나는 ‘비판’하지 않는다”는 구호 하나만을 무슨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양 휘둘러대지만, 실제로는 진리의 싸움 앞에서 스스로 의기소침하여, 자신의 비겁하고 나약하여 용기 없음을 감추기에 급급한 위선에 불과한 경우들이 적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옥체가 그야말로 인간의 종교심에 의해 오만 가지 추악하고 더러운 오물로 덕지덕지 도배되다시피 한 모습 앞에서, 어떻게 마음 가운데 거룩한 의분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선 교회의 역사성의 계승 또는 교회의 정통성의 지속 문제에도 이해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계승이란, 조상의 전통이나 문화적 유산 및 업적 등을 물려받는 것, 즉 상속을 가리킨다. 원칙상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사도들의 시대로서 끝난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들의 복음전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교회가 창설되었다 하는 뜻이다.

이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전형적인 성경구절을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라고 한 대로인 것이다.

사도들이 교회를 창설했다고 할때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사도적 신앙고백의 계승(사도신경 고백), 둘째, 신앙고백에 대한 해설(신약성경 기록), 셋째, 공동체 안에서의 질서 제정(직분 제도), 등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과거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모형 형태로서 계시되어 나온 교회가 마침내 시공간 속에 데뷔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시대 이후로는 더 이상 교회 창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후로는 이렇게 창설된 교회, 또는 완성된 교회가 시공간의 영역에서 충만해져 가는 과정,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는 일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충만한 데까지 자라간다’라고 한 표현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장이나 확장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질적 성숙이라고 해도 좋은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창설 되었다”라고 할 때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완성 되었다!’ 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실 때에 창세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간에 맺으신 협정(구속의 언약)에 따라, 택함을 입은 자들의 충만한 숫자가 하나도 잃어버린 바 없이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는 일(은혜의 언약)도 동시에 실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에서 보건데,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무대에서 마치 일종의 배우처럼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는 격이 되는 것이다.

이 무대에서 이 사람은 자기의 역할을 하고, 저 사람도 자기의 역할을 하는 식으로 일종의 연극이 역사를 이어 계속 진행되는 것인데, 이것을 ‘전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잘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우리교회주의’라고 하는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다. 교회 창설은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고, 지금은 그렇게 창설된 교회가 역사라고 하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본연의 가치를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발현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만 안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나 어느 역사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라고 하는 그 본연의 성질 및 가치에 있어 변함없이 동일하다. 수천, 수만 명이 모인 교회는 더 훌륭하거나 더 귀하고, 수십, 수백 명이 모인 교회는 덜 훌륭하고 덜 귀한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 결코, 단연코, 아니다. 오히려 참 교회냐 아니냐의 문제만이 있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대에 과연 어떻게 해야 교회로서의 본질과 가치를 내적으로 향유하고 외적으로 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교회의 역사성의 계승 또는 교회의 정통성의 지속, 즉 계승과 상속을 잘 함으로써, 사도들이 했던 일을 계속 이어가는 데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나감에 있어서 항상 성경에서 원리를 찾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행여 독선과 독단에 빠져서는 안 되므로,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서 창설된 개혁교회의 생명력을 계승하고 상속하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에 결코 게으르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 스스로 무슨 우월성에 고취된다거나, 보란 듯이 자랑하겠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라면 마땅히 품고 받들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최대의 보람이기에, 하나의 교회, 즉 보편의 교회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메시지는 우리교회를 넘어 다른 교회들을 위한 것도 되어야 한다.

이 원리를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흔히들 “다른 교회를 비판하지 말자” 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름지기 세상을 상대로는 불쌍히 여겨 아낌없는 동정심으로 온갖 기회를 살려 복음을 전해야 한다. 또 도전을 걸어오면 전투적 교회로서 과감하게 응전해야겠지만, 같은 교단과 교회를 상대로는 그렇게 싸울 수는 없다. 대신 ‘함께 올바르게 되자!’ 하는 자세를 전제로, 필요한 경우 의당히 건전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처럼 같은 하나님,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를 운운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교회의 본 모습에 있어서는 엉뚱한 길로 내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안이 있느냐 할 때, 그 비판 자체가 일차적 대안이 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이 난무하는 현실 앞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만큼은 해야 하지 않는가. 군중심리에 휩쓸려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는 허망한 구호를 부르짖으면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듯이 착각하는 왜곡된 집착증으로서의 종교성을 절제하고, 또 절제하고, 그리고 또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실로 우리로서는 이 문제 앞에서 졸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 내부에서도 혹시라도 쓴 뿌리가 나는 일이 없도록(히12:15) 항상 긴장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올바르게 되어야 하고, 건전한 비판을 해서라도 함께 올바르게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