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지혜와 지혜서란 무엇인가<2> _ 현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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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지혜와 지혜서란 무엇인가 <2>

 

<현창학 교수 | 합신 은퇴, 구약학>

 

<글 싣는 순서>

  1. 지혜란 무엇인가
  2. 지혜서란 무엇인가

 

실천적 지혜인 잠언은
보응의 원리란 도덕질서를 상기시켜
의로운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계산이 서지 않는 삶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의 깊은 것,
그 지혜를 조금씩 익혀나간다

 

  1. 지혜서란 무엇인가

 

지혜에 대해 살폈으므로 이제 지혜서가 어떤 책인가 알아보기로 하자. 지혜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혜서의 분류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지혜서는 크게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와 사색적 지혜(speculative wisdom) 둘로 나눠진다. 이 분류의 기준이 되는 것은 소위 보응의 원리(retribution principle)라는 사상이다. 보응의 원리란 “의로운 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성공과 번영이 따르고 악한 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실패와 파멸이 따른다”는 법칙이다.11) 앞 항에서 의로운 생활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이 따르는 것이 우주의 도덕질서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바로 이 질서를 이르는 말이다. 보응의 원리는 세계가 의의 질서로 운영되도록 하나님이 우주에 심어놓으신 도덕법칙이다.12) 이 보응의 원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두 지혜가 나눠진다. 실천적 지혜는 보응의 원리를 긍정하며 삶의 원리로 적극 권장하는 지혜이고, 사색적 지혜는 보응의 원리에 대해(또는 그것의 시행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회의하고 항의하는 지혜이다. 잠언은 실천적 지혜로 분류되고, 욥기와 전도서는 사색적 지혜로 분류된다.13) 각 지혜에 대해 살펴보자.

 

1) 실천적 지혜14)

바르고 의로운 삶에 성공과 번영이 있고 악하고 불의한 삶에 실패와 파멸이 따른다는 도덕 원리, 즉 보응의 원리를 적극 전파하며 이 원리를 염두에 두고 바른 생활을 할 것을 강력히 권하는 지혜이다. 잠언이 여기에 속한다. 인간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실천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지혜란 의미에서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란 이름이 붙여졌다. 오랜 경험의 바탕 위에 얻어진 실제적인 교훈들이므로 경험적 지혜(experiential wisdom)라고도 하고, 생을 하나의 요리로 비유하여 좋은 ‘요리’가 되게 하는 처방(조리법)이 된다는 의미에서 처방 지혜(recipe wisdom)라 하기도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훈의 기본 사상은 보응의 원리이다. 즉, 의롭게 사는 삶에 번영과 축복이 보상으로 주어지고 악하게 살면 멸망과 저주가 따른다는 생각이다. 특히 잠언은 이 사상을 수없이 증거한다. 구절로 직접 증거하기도 하고, 배경이 되는 신학으로 증거하기도 한다. 구절로 직접 말하는 예를 (수많은 예 중에) 몇 개만 들면 다음과 같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잠 2:21-22)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10:3) 의를15)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11:19)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14:11)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29:6)

실천적 지혜는 이 의의 원리를 “삶의 기술”로 가르친다. 실천적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이 성공하는 인생을 살기 원하는데(장수, 재물, 존귀, 행복, 평안, 생명 등; 잠 3:16-18) 그러기 위해서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해서 강조한다. 보응의 원리는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의 삶에 심어 놓으신 도덕 질서이자 세계가 운영되도록 정하신 내적 원리(built-in principle)이다. 인간은 이를 거슬러 살 생각을 해선 안 된다. 이 원리를 잘 이해하며,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격 속에 깊이 내재화하여 기필코 이 원리와 조화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개인이 복을 받으며 나아가 사회도 건강한 선진사회로 성장하게 된다. 인간을 구속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유로우며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을 빚어내려 하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지혜 사상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정통적(orthodox) 가르침에 해당한다. 지혜 사상 전체의 표준이요 기준이 되는 가르침이다. 사색적 지혜도 실천적 지혜의 가르침에서 출발한다. 실천적 지혜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삶의 모호성, 비일관성(비규칙성), 모순 등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는 것이 사색적 지혜이다. 한편, 시편에도 지혜 사상을 담은 시, 즉 지혜시가 여럿 나오는데 그중 실천적 지혜에 해당하는 시들은 1, 19B, 32, 37, 112, 119편 등이다.

 

2) 사색적 지혜16)

사색적 지혜(speculative wisdom)는 실천적 지혜가 가르치는 보응의 원리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지혜를 말한다. 욥기와 전도서가 여기에 속한다. 실천적 지혜의 본래적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변칙과 모호성이 가득한 실존 세계에 대해 하나의 단순한 법칙만을 천편일률적으로 고집할 때 발생하는 모순과 한계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사색적 지혜란 이름이 붙여졌다. 인간의 삶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비판하기 때문에 반성적 지혜(reflective wisdom)라고도 하고, 인간의 실존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는 의미에서 실존적 지혜(existential wisdom)라 하기도 한다.

사색적 지혜는 기본적으로 실천적 지혜가 삶의 기술로 내세우는 보응의 원리에 대해 반발하는 지혜이다. 정통적 가르침인 보응의 원리에 대해 “이단적”으로(heterodox) 질문하며 항의한다. 의롭고 바르게 살아도 고난과 불이익을 받는 수가 있고 거짓되고 악하게 살아도 형통하고 유리하게 되는 수가 있는 삶의 현실을 목도하며 의의 질서가 왜곡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것을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고민이라 한다. 욥기와 전도서는 이 고민을 거듭 표출한다.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욥 9:22)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 12: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보라 내가 “폭력이라!” 하고 부르짖으나17)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18) 없구나 (욥 19:6-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욥 21:7-9)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7:15)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4)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전 9:2)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전 9:11-12)

신정론의 고민은 비단 지혜서에만(욥기, 전도서) 특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 고민은 구약의 모든 저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선지서에도 이 고민이 많이 나온다. 다음의 예를 보자.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렘 12:1) 어찌하여 거짓된 자를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합 1:13)

신정론의 질문(사색적 지혜)은 때로는 너무 부정적이고 너무 과격해서 과연 이것이 신앙적 질문이 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위태하고 위험하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바른 지식을 얻어 가는 길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신앙의 필수불가결적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대로 사람의 법칙이나 계산 속에 구속되거나 제약되는 분이 아니시다. 인간의 상상과 통제를 넘어서는 영역의 경륜적 신비를 지니신 분이시다. 삶과 역사의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은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수없이 질문했다. 처음에는 고통에 대한 반작용으로(reactive) 질문을 시작했겠지만, 이내 그것은 자신들의 파악 능력으로는 이를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경륜의 깊이에 대해 참되게 배우게 해주는 생산적인(productive) 과정이 되었다. 단순한 반항이거나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에 대해 신앙적 해법을 구한 것이다. 사색적 지혜는 낭비된 질문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크심과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경륜의 깊이에 대해 알아간 신앙의 정상적 과정이다. 실천적 지혜처럼 사색적 지혜도 시편 기자들의 사상 속에 깊이 스며 있다. 사색적 지혜의 요소를 띤 시편들로는 37, 49, 73, 139편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지혜서를 두 가지의 지혜로 분류해 보았다. 실천적 지혜인 잠언은 보응의 원리란 도덕질서를 상기시키며 인간으로 하여금(특히 젊은이) 의로운 삶을 살 것을 부단히 강조한다. 지혜의 정통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인간이 바른 삶을 살아서 자신의 삶이 기필코 성공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한다. 어떤 형편에 처해 있어도 “바른 선택”(right choices)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인 성공의 길이며 또한 인간이 사는 의미이다. 잠언은 특히 젊은이를 교육 대상으로 한다. 잠언은 젊은이들이 이끌게 될 미래의 사회가 (하나님의) 의로 충만한 사회가 될 것을 기대하는 염원을 품는다.19) 젊은이들을 거짓과 사곡(邪曲)이 없는 바른 인격으로 교육함으로 그들이 이끄는 세상이 불의와 악이 사라진 건강한 의의 세계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은 한 편으로는 인격 훈련서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정신의 배양을 지향하는 사회사상서이다. 진정으로 자유하고 복된 인간이 되게 하는 성숙한 인격의 함양, 바르고 건전하며 강한 선진사회를 가능케 하는 사회정신의 확립, 이 두 가지가 잠언이 추구하는 이상이다.

사색적 지혜인 욥기와 전도서는 정통 지혜 사상이 기대하는 도덕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우주는 의의 법칙, 즉 보응의 원리에 의해 운영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 삶과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다. 의인이 곤경과 낭패를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며 흥왕한다. 연약한 민족이나 국가는 강대국의 먹잇감이 되어 인명을 포함해 많은 것을 수탈당하는 곤경에 처하는데 가해자인 강대국은 일로 번창하고 승승장구하며 세계무대에서 큰 소리를 치며 자신들 중심의 질서를 구축해 나간다. 연약한 자들의 억울함은 호소할 데가 없다. 들어줄 이도 없으며 그것을 해소해 줄 기구는 더욱 없다. 과연 하나님의 의의 질서란 것이 존재하는가. 가치가 거꾸로 선 것 같은 혼란과 혼돈의 세상인데 과연 의를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도덕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구약성경은 “의”의 문제에 과도할 정도로 깊고 큰 관심을 보이는 책이다. 산문 본문이건 시 본문이건 구약성경 어디서나 의에 대한 관심을 찾을 수 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구약성경에는 의(또는 공의)라는 말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오며 의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것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모르고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의를 믿는 신앙인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의 의를 믿는 것이었다. 의를 믿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의로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시고 이스라엘이 살도록 허락된 이 세계는 반드시 의라는 질서로 통제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세계의 도덕질서, 즉 의의 당위를 믿는 신앙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의의 질서가 작동되지 않는 것을 목도할 때마다 상당한 고통, 번민과 더불어 신앙에 큰 도전을 겪어야 했다.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시는가, 존재하신다면 의로우신가, 의로우시다면 그 의를 시행할 능력이 있으신가 등 온갖 (위험한) 신학적 질문들이 그들의 신앙 양심을 흔들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다면 이와 같은 무질서와 혼란은 용인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기와 전도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양심의 고통과 믿음의 위기를 술회한 책이다.20)

하나님은 사람이 기대하는 것처럼 우주를 “계산적으로” 운영하는 분이 아니시다. 인간의 계산적 지혜로는(nachrechnende Weisheit)21) 하나님의 우주와 역사 운영을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주의 도덕질서인 보응의 원리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세계의 기본 질서로 영원히 있다. 다만 우주와 역사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경륜은 인간의 지혜의 한계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을 가지고 계시며 이 영역에서 세계를 운영하신다. 기대했던 도덕질서가 예상대로 확인되지 않음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의의 질서, 즉 보응의 원리가 여전히 중요한 세계의 질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세계를 운영하는 방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지와 통제 능력 위에서(above), 그리고 그것들을 넘어서(beyond) 우주를 운영하신다. 하나님의 ‘자유’이다. 이스라엘은 삶의(그리고 역사의)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 자유에 대해 배워 나가야 했다.

빌 게이츠가 어느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면서 이제 막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졸업생들에게 두 가지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한다. 첫째, 지금 도서관에 앉아 있는 네 친구를 비웃지 마라. 왜냐하면 언젠가 그가 너의 직장 상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둘째, 세상은 항상 공정치 않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도록 하라. 세상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기대한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은 경우를 많이 보여주기 때문에. 빌 게이츠가 우리가 위에서 분류한 두 가지 지혜에 대해 학습하고 강연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의 교훈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분류한 두 지혜와 정확히 일치한다. 첫 번째 교훈은 정직과 성실을 장려하는 실천적 지혜이고, 두 번째 교훈은 의의 부재 상황에 대해 당황하지 말고 마음으로 준비할 것을 조언하는 사색적 지혜인 것이다. 우리의 두 지혜 범주 구분은 단순히 학문적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실제 삶을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현실이며, 또 그 현실을 지배하는 원리이다. 마땅히 의롭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성공의 비결이다. 바르고 성실한 삶의 자세는 인간의 삶의 내용, 질 뿐 아니라 결과를 결정하는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사는 것 자체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한편 모순과 불합리가 가득한 세상을 견뎌내는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다. 바른 삶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당장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거듭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다.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 그 현실을 붙들고 ‘싸우지’ 않아야 한다.22) 모순과 부조리라는 삶의 현실에 ‘익숙해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사랑스럽지 않은 현실에 대처하여”(to cope with unlovely realities) 다치지 않고 생을 살아가는 비결이다. 또한 우리는 이처럼 ‘계산’이 서지 않는 삶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오히려 놀랍게도 하나님의 경륜의 깊은 것, 하나님의 지혜의 다다를 수 없는 깊은 것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익혀나가게 된다. 우리가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부조리한 삶의 현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심을 배우는 학교에 다름 아니다. <끝>

 

각주 >—————————–

11) 현창학, 『구약 지혜서 연구』, 87.

12) 보응의 원리의 “보응”이란 말이 너무 강해서 학자들은 이 용어를 피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왔지만 그것들이 그리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보응의 원리란 말에 불가피하게 따라 다니는 언어적 선입견의 문제와 역시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신학적 오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서는 현창학, 『구약 지혜서 연구』, 91-98을 참고.

13) 외경에서는 벤 시라, 즉 집회서(Ecclesiasticus)는 실천적 지혜로, 솔로몬의 지혜(The Wisdom of Solomon)는 사색적 지혜로 분류되는 것으로 본다.

14) 이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은 현창학, 『구약 지혜서 연구』, 35-36을 참고.

15) 개역개정이 “공의”로 번역하는 처다카는 “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16) 이에 대하여는 현창학, 『구약 지혜서 연구』, 36-37을 참고.

17) 필자가 개역개정을 교정함. 개역개정에는 “보라”가 빠져서 첨가했다. 개역개정의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는 원문의 직접화법 “내가 ‘폭력!’이라고 부르짖었다”를 간접화법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 경우 간접화법은 시의 힘을 현저히 약화시키므로 원래대로 직접화법을 복원시켰다.

18) 개역개정 “정의”는 여기서 미쉬파트에 대한 적절한 번역이다.

19) 마태복음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6:33) 잠언과 구약의 사회적 이상을 표현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20) 사실 의의 부재로 인한 무질서에 대한 고민은 욥기, 전도서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구약 전체가 이 고민에 시달린다. 구약은 산문, 시 할 것 없이 어디서나 이 고민을 토로한다. 욥기와 전도서는 이러한 구약 전체의 고민을 대표해 그것을 집약적으로 말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21) 이 용어에 대해서는 Walther Zimmerli, 『구약신학』, 김정준 옮김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6), 216을 참고할 것.

22) 필자는 의의 부재라는 현실을 바라보는 전도서의 지혜를 ‘싸움을 포기하라, 물러서라, 그리고 받아들이라!’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현창학, 『구약 지혜서 연구』,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