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 ‘카노사’의 길과 ‘아나니’의 길 _ 김중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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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카노사’의 길과 ‘아나니’의 길

 

<김중락 교수 | 경북대 역사교육, 말씀동산교회 장로>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길을 가야 한다

코로나는 교회가 무너진 터를 바로 세우는 기회이기도 하다

 

 

  1. 길 잃은 한국교회

수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어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한국 사람들은 예고된 일에 대해서는 대처를 잘한다는 것이다. 손님이 온다면 철저히 준비해서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예고 없이 찾아왔고 당연히 준비 안 된 우리사회는 대처능력 없이 허둥대다가 소중한 어린 생명들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19에 대처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와 다를까? 초기 코로나가 창궐할 때 영상예배 문제로 우물쭈물하다가 수십 명이 집단으로 감염되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지난 3-4개월 동안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는 상황을 목격해왔다. 교회가 코로나 전파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은 “종교모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교회를 의미하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지금도 방역수칙을 지키지 아니한 교회가, 교회지도자들의 모임이 집단감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진정 오늘날 한국교회는 공공의 적이다. 교회를 비난하는 일에 여야가 따로 없고, 진보, 보수 언론이 따로 없다. 이러한 혼란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망각한 탓이다.

 

  1. 카노사(Canossa)의 굴욕
Henry at Canossa, history painting by Eduard Schwoiser (1862)

누구나 잘 아는 사건이다. 1075년 12월 8일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카노사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이다.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았고 이에 대한 사면을 받기 위해 교황의 처소 밖 눈밭에서 사흘간 서 있었다고 한다. 과장이 있는 이야기겠지만 황제가 굴욕을 당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세상은 황제를 누른 교황권의 강대함을 비판하지만 당시 교황의 입장은 분명 명분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 원인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같은 고위성직자의 서임권 문제였다. 교황의 고위성직자의 서임권 요구는 교회개혁의 일환이었다. 세상의 부당한 간섭으로 교회가 신음하고 있을 때 고위성직자에 대한 서임권은 교회개혁의 필수조건이었다. 세속권력에 의해 무자격자가 고위성직자로 임명되는 상황을 두고 교회개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서임권 투쟁에서 교회의 승리는 바로 명분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도 이러한 명분을 인정하였고, 이는 바로 교회의 대표자인 교황의 힘으로 나타난 것이다. 교회의 힘은 교회가 교회의 길을 갈 때 발휘되는 것이다.

 

  1. 아나니(Anagni)의 굴욕

1303년 9월 7일 73세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이탈리아 중부 아나니에서 그의 정적 프랑스왕 필립 4세의 심복 노가레와 꼴로냐가 이끄는 약 이천 명의 용병대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3일간 교황을 감금하고 굶겼다. 일설에 따르면 꼴로냐는 감금된 교황의 따귀를 때렸다. 교황은 3일 뒤 풀려났으나 그때의 상처와 모욕에 대한 분노로 한 달 뒤 사망하였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아나니 사건’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를 ‘아나니의 굴욕’이라고 칭하고 싶다. ‘아나니의 굴욕’은 사제들에게 과세하려는 필립 4세와 이를 반대하는 교황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필립 4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준비를 위해 사제들에게 과세를 하고자 하였고, 교황은 1302년 그 유명한 교서 ‘우남 상탐(Unam Sanctam, 유일한 성스러움)’을 내렸다. 그 내용은 영적 권력은 위엄이나 고귀함에서 세속권보다 우월하며, 만일 세속권이 과오를 저지르면 영적 권한(교황권)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나니의 따귀 때리기’는 ‘우남 상탐’에 대한 필립 4세의 대답이었다.

이 사건은 명분을 잃은 교회의 참사라고도 할 수 있다. 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한 교황은 세속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부렸고, 교회의 길을 버리고 세속통치자로서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교황들은 스스로 영적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세속적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세속적 이해를 위해 영적인 권한을 남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십자군을 제창하기도 하였고, 개인의 치부를 위해 “베드로의 펜스”를 거두고 희년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사제에 대한 과세거부도 실은 물질적 욕심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세속권력자들은 교회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하나로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교황으로부터 정신적 권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온 세상이 교황과 교회를 욕하는데 그들에게 어떤 권위가 남아 있겠는가? 우남상탐을 외친들 누가 듣겠는가? 아나니의 굴욕은 교회의 명분 잃기의 결정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 너무나 세상 같은 교회

교회가 카노사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아나니의 길을 갈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나니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십자가를 내걸었지만 세상과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교회를 찾아오건만 그들이 듣고 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다. 그것도 초보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거나, 짝퉁이다. 회원을 늘리고, 건물을 늘리고, 최고의 시설을 갖춘 교회를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돈과 재산을 위해서는 형제자매를 떠나 송사를 벌이고, 목사직을 세습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과 다름이 없는 모습을 본다. 아니 더 적나라한 모습을 보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교회는 ‘우남 상탐’을 외친다.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그래 봐야 세상은 이미 우리의 모습을 알고 있으니 카노사가 아니라 아나니로 반응할 뿐이다.

 

  1. 교회의 길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길을 가야 한다. 세상과 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길은 세상의 것이 아니다. 교회는 역설을 통해서 권위를 확보한다. 나약함으로써 강함을 보여주고, 섬김으로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도 이웃을 위해 양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코로나는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욕하게 만드는 기회가 아니라 교회가 무너진 터를 바로 세우는 기회이기도 하다. 제2의 감염사태가 온다고들 말한다. 이제는 “신 없는 성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총력을 기울여 방역에 협조하고, 적극적으로 의료진과 환자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게 교회의 길이 다름을 보여주어야 한다.

 

김중락 교수>>

♣경북대, 영국 케임브리지 대 박사(역사학)
♣역사교육회장 역임, 영국사학회장
♣<주요 연구 분야> 스코틀랜드 교회사, 웨스트민스터 총회, 청교도 영국혁명 등
♣<저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 존 녹스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