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논단
‘기복신앙’과 ‘고난은 축복이다’에 대하여
<문성환 장로 | 남포교회>
기복신앙과 고난에 대한 기존의 오해를 피하고
본래적 의미를 잘 알고 적용해야
소위 ‘기복신앙’이 기성 교회와 교인들에게 어떤 폐해를 끼치고 있는지는 이미 주지의 사실일 것이며, 이에 대항하여 여러 복음주의 교단에서 ‘고난은 축복’이라는 주제의 메시지를 균형 있게 증거하고 있음은 정말 귀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 너무 단순하게 표현된 이 두 개의 명제들이 신앙적으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도 있다. 예를 들어, ‘운동은 건강에 좋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명제가 항상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논리학을 빌려 오지 않더라도, 이 경우엔 ‘운동은 일반적으로 건강에 좋다’라고 표현함으로서, ‘일반적으로’라는 제한적인 수식어와 함께 표현돼야만 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성질환자에게는 어떤 운동이 오히려 독이 될 것이며, 또 욕심을 부려 본인 체력에는 과도한 운동을 할 경우엔 오히려 건강을 망치는 경우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기 두 명제의 경우도, 성경에 근거한 어떤 제한적인 수식어가 첨가돼야만 참이 될 수 있다. 먼저, ‘기복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자들 중에는 하늘의 복을 중시하며, 이 땅에 속한 복들을 조금 낮추어 보려는 이들도 있다. 유교의 전통, 황금을 돌 같이 보라는 선인의 말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또 분명히 성경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땅에 속한 복들은 결국 사라지고, 하늘에 속한 복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또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복을 풍성히 받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만약 신자들에게 이 땅의 복들이 전혀 필요 없다면 하나님께서 왜 땅의 복들을 풍성히 주신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을까? 구약의 몇 구절만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26:1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창13:2)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창24:35)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신28:3-4)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나아오는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다. 예수님께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 중에도 아마 상당수는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얻지 못한 자들도 분명 있었을 것임이 누가복음 17장 아래 구절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이 땅의 복을 주신 것 아니실까?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료하여 주셨는데 그 중 한 명만 가던 길을 되돌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나아오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눅17:17-18)고 책망하셨으니, 이 말씀은, 이 세상 병 고침 받는 복에만 관심이 있고, 그 기적을 통해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책망 아니실까?
그러하다면 이 세상 복을 구하는 기복신앙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받은 세상 복을 통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구하고 찾지 않는 것이, 소위 기복신앙 문제의 내재적 문제점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 아픔과 고통을 당할 때에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시기를 부르짖는 복을 구하는 기도와 이 땅의 필요한 복을 구하는 기도까지 기복신앙이라는 틀에 넣어 터부시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연 누구에게 나아가 부르짖을 수 있을까?
성경은, 아사왕이 발에 병이 났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의원을 의지하였다고 안타까움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울 왕이 외롭고 힘든 지경에 처해졌을 때, 하나님께 엎드리지 아니하고 신접한 자를 찾았다고, 성경이 그의 잘못을 통렬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근거에 비추어 보면 ‘기복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다’라는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세상 복에만 눈이 멀지 아니하고, 하나님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더욱 구하고 의지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며,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 세상의 필요를 구하면서도, 혹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우리의 기쁨을 삼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우리의 즐거움을 삼겠다는 그러한 믿음으로 자라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임을 분명히 적시함으로서, 기복신앙이라고 단순하게 표현됨으로 인해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을, 명쾌하게 분리하여 설명해 주어야만, ‘기복신앙은 잘못된 믿음이다’라는 명제가 우리에게 비로소 참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고난은 축복’이라는 명제는 ‘항상’ 참인가? 예수님도, 사도바울도, 믿는 신자들에게 고난이 따를 것임을 거듭하여 말씀 하셨음을 우리가 안다. 그리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그 말씀에 아멘 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그렇다 하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고난 그 자체도 즐거운 것이 되는 것일까? “그래, 고난아, 언제든 와 봐라. 나는 고통이 전혀 두렵지 않고, 환난이 무섭지 않다” 이렇게 고난을 대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까?
만약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사단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왜 하나님께 먼저 세 번이나 기도를 드려야 했을까? 예수님 왜, “할 만 하시어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셔야 하셨을까? 만약 그 고난 자체가, 육체를 가진 인생이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과 아픔이 수반된 것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세 번씩이나 그러한 기도를 하실 필요 없지 않았을까? 연약한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은, 그가 설혹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육체가 부서지는 아픔과 고통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고난을 맞이하면 누구나 그 곤경에서 건져 주시기를,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것 아닐까?
그런 후에 만약 하나님의 응답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하시면, 그 때는 건져달라는 기도를 멈추어야 할 것이며, 이제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며, 그 고난을 아픔을 견디면 통과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때로 ‘고난이 축복’이라고 하는 명제가 갖는 표현의 한계로 인하여, “나는 이 고난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지 않겠노라, 그냥 기꺼이 감당하겠노라” 이런 방식으로 고난을 대한다든가, 고난당하는 그 자체를 미화시켜 마조히즘(고통을 만족으로 느끼는) 식으로 나아가려는 그러한 위험이 있다면, 이 또한 우리가 경계하여야만, 그 명제가 비로소 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설교자가 아무리 메시지를 바로 전하려 애쓸지라도,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신자처럼, 상당수의 신자들은 대로로 걸어가기 보다는 샛길의 유혹에 자주 쉽게 빠지게 되는 바, 이 명제들에 대하여 혹 잘못된 길로 빠져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