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제발 사이좋게 좀 지내자

0
59

사설

 

제발 사이좋게 좀 지내자

 

코로나19로 뒤숭숭한 와중에 큰 비극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2020년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파우더호른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위조지폐 관련자로 의심받아 체포되는 중 백인 경관 데릭 쇼빈이 8분 46초간 그의 목을 무릎으로 눌렀다. 숨을 못 쉬겠다고 하소연했다. 단말마였다. 끝내 의식을 잃어 사망했다. 수갑을 찬 채 땅에 엎드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공무를 빙자한 이 살인의 진상이 목격자들에 의해 알려져 미국 전역과 세계가 시위의 격랑에 빠졌다. 단지 흑인 한 사람의 사망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19로 죽는 것과는 또 다른 비극적 배경 때문이다. 플로이드를 질식시킨 폭력을 자유롭게 해 주고 그 목을 누른 무게에 가세한 폭력의 후원자는 하나가 아니다. 인종차별의 구조적 모순과 누적된 불안, 경찰조직과 법규의 폐단, 경관의 인격적 결함 등 거론할 항목이 부지기수다. 그 모든 교훈의 핵심은 오늘 우리도 직접 살인은 아니라도 방관과 혐오와 차별의 살인으로 제6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십계명의 모든 계명이 ‘하라’와 ‘하지 말라’가 결합돼 있다. 제6계명도 ‘살인하지 말라’ 와 ‘생명을 살려라’ 둘 다 포함된 계명이다. 직접 살인과 간접 살인을 다 말한다. 직접 생명을 빼앗는 것은 물론 생명을 존엄하게 대하지 않고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방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간접적 행동들도 살인이다. 차별하고 보호하지 못하는 것, 또 그런 열악한 사회와 환경 조성에 일조한 모든 폭력과 폭력 방조와 이기적 삶이 살인의 범주에 든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고 루터, 칼빈, 청교도들이 적용한 삶의 원리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 문서의 해석이다(대요리문답 134-136문).

제6계명의 광범위한 적용에 놀라거나 반발심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어떻게 감당할 건가?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 사도 요한의 다음 말씀은 또 어떤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며 더더욱 제6계명을 윤리적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다. 플로이드 사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차별 없고 갈등 없는 화목한 나라를 만들어 갈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와 사회관계에서 이런 살인죄에서 멀어지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안 속에서 늘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러라 하신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If it is possible, as far as it depends on you, live at peace with everyone”(롬 12:18, NIV)] “할 수 있거든”이란 “힘닿는 데까지”란 뜻이다. “할 만 하거든” “어지간하면”이 아니다.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말라는 게 아니다. 화평에 의지를 갖고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 12:14상).

위의 히브리서 말씀에서 화평과 거룩의 순서는 어딘가 낯이 익다. 굳이 시간적 순서가 아니고 병렬이더라도 먼저 화평을 추구하는 건 맞지 않는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고 했다. 그만큼 화평이란 의지적인 자기성찰과 노력을 수반한다. 게다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고 했다. 왜 주의 재림으로까지 거룩한 협박을 할까? 주께서 모른 체하시지 않고 사랑과 화평에 대해 결산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다툼 없이 너그럽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거다.

사이좋게 지내라. 어릴 적부터 참 많이 듣고 배워 쓰던 말이다. 물론 우리만이 아닌 세계적으로 화목을 독려하는 말일 테지만 아무래도 인간 사회의 본질적 갈등과 분쟁의 배경을 업고 있는 듯해서 썩 개운치는 않다. 계산과 이익을 따라 다툼이 많고 힘의 논리로 누군가 차별 받아 울면 반대편은 특대를 받고 웃는 세상. 이념과 체제와 무관한 세계 공통의 비극적 현실이다.

“내가 귀하면 남 귀한 줄도 알아라”(마7:12). 예수님의 황금덩이 말씀이다. 서로 귀하게 여겨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살라는 거다. 그런데 탐욕으로 받기만 하고 필요 이상 더 받아 내거나, 안 주고 덜 주고 심지어 빼앗으니까 사단이 나는 거다. 남의 고통 위에 내 기쁨을 세우는 것. 차별은 그런 욕망의 극악한 도구이다.

국제적, 개인적, 사회적 관계도 동일하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미국과 세계가 들끓지만 언제까지 이런 일들이 되풀이 돼야 하는가.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꿈이라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톤 평화 대행진이 있은 지 52년이다. 그런데 여전히 슬픔이 진행중이라니 가슴 아프다. 내 주변 사람들을 존엄하게 대하자. 남보다 태생이 더 좋다거나 더 가졌다거나 백인, 흑인, 황인, 선진국, 후진국 운운하며 차별하는 유치한 일 좀 그만하자. 턱없는 무시나 차별을 아예 말자. 주께서 말씀하신다. “사이좋게 좀 지내라.” 사실 참 부끄럽다. 아주 어린 시절 이후 우리가 아직도 이런 말을 듣고 산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내든 국외든 미성숙한 어른들이 과다한 이 시대에 제발 사이좋게 좀 지내자, 어른 아이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