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칼럼| 구약 이스라엘과 질병 _ 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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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칼럼

 

구약 이스라엘과 질병

 

<김진수 교수 | 합신, 구약학>

 

건강하나 병드나 예배할 특권 있지만

질병이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삶을 못 해치게 철저히 관리해야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온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 개학을 연기했던 학교들은 추가로 개학연기를 고심하고 있으며 대학들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대신해야 하는 등 전례 없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전염과 확산이 빠른 바이러스의 특성상 교회가 예배로 모이기에 어려운 형편이 됨에 따라 성도들이 온라인이나 다른 방식을 통해 가정이나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불가피해졌다. 이런 환란의 때에 질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성경에서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미 지교회와 교단별로 이런 성찰과 고민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줄로 안다. 이에 필자는 구약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구약 레위기를 통해 질병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레위기 13-15장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겪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질병이 소개된다. 특히 레위기 13:1-46은 피부에 생길 수 있는 다양한 질병과 그것의 진단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곳에 히브리어로 언급된 병명이 현대의학이 사용하는 병명들 가운데 어떤 것에 해당하는지 정확히 알기란 쉽지가 않다. 개역개정역에는 “피부병”, “나병”, “종기”, “옴”, “어루러기” 등의 명칭이 사용되며, 이 질환의 병증은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기는]”(레 13:2) 것이다. 이런 병증을 가진 환자를 진찰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부에 변화가 있는지, 병색이 피부에 퍼지는지, 환처가 다른 곳보다 우묵한지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관찰의 목적은 문제의 질병이 나병(히브리어로는 “짜라아트”)인지 아닌지 밝히는 것이다. 그 질병이 나병이면 환자는 부정하며 그렇지 않으면 정결하다. “부정”과 “정결”은 의학적인 용어이기보다 제의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부정하다는 것은 그가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환자를 진찰하는 목적이 치료가 아니라 제의적인 것에 있다 보니 이 일의 담당자는 당연히 제사장이어야 했다.

레위기 14:1-32은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었을 때 밟아야 할 제의적 절차를 알려준다. 환자는 먼저 제사장에게서 환부가 나았는지 여부를 확인 받는다. 환부가 나았다고 판정될 경우 제사장은 그에게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와 함께 새 두 마리를 가져오게 한다. 이 중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그 피는 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며, 나머지 한 마리는 산 채로 들에 놓아 보낸다. 구약 신학자 왈트케(B. K. Waltke)는 이 의식이 각각 예배 공동체와 단절된 시간의 종결과 질병에서 풀려난 자유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의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환자는 어린 숫양 두 마리, 일 년 된 어린 암양 한 마리, 고운 가루 십 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고 제사장은 그것으로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를 드려 그를 속죄하여야 한다. 제사장은 또한 환자가 가져온 기름으로 환자의 오른 쪽 귓불, 오른 쪽 엄지손가락, 오른 쪽 엄지발가락에 바르고 남은 기름으로는 그의 머리에 바름으로써 여호와 앞에서 그를 속죄하여야 한다. 이런 세밀하고 철저한 의식은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제의적 정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레위기는 질병을 제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나병과 같이 중한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상태에 있기에 정결함이 인정되기까지는 예배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 레위기는 인간의 질병을 진단함에 있어 그것이 가진 전염성이나, 건강에 끼치는 피해나, 치사율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레위기는 예배 공동체에 요구되는 거룩과 정결에 배치된다는 의미에서 나병이나 유출병 등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는 여호와께 바치는 지극히 거룩하고 정결한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정하고 속된 것이 예배를 더럽히지 않도록 철저한 노력을 기울였다. 누군가에게 질병이 생기면 그것이 예배에 허용될 수 있는지가 우선된 관심사였다. 인간 삶을 위협하는 질병 앞에서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 관심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었다.

레위기의 이런 가르침이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오늘의 성도들도 옛 이스라엘 백성 못지않게 각종 질병의 위협 앞에 있다. 의학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질병에 민감해져 있다.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 등으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질환의 전염성이나 전염경로, 치사율 등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레위기는 분명히 육체의 건강이나 위생문제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피부질환자나 유출병자를 공동체에서 격리시킨 이유도 예배를 위한 일이었다. 따라서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불안한 형편에 있지만 성도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은 당연히 예배여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정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위해 가능한 모든 관심을 다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레위기의 가르침이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약 시대에 나병이나 유출병은 제의적인 차원에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질고”를 짊어지셨고 부정한 우리를 위한 “속건제물”이 되어주셨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 질병은 더 이상 없다(사 53:3, 10).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인 치유와 정결을 획득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종말과 교차하는 현재의 삶에서 질병은 여전히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와 성도의 삶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에서 그랬듯이 성도들은 질병이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삶을 해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세심하게 살피는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5-1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되새겨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육체의 어떤 질병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한 부패성이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이상으로 죄의 바이러스를 물리치는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 손을 씻고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노력 이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의 자유와 특권이 주어졌다고 하여 이웃에 대한 배려나 대사회적인 책임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바울이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1)고 한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이는 형제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록 우리가 질병을 가지고도 예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형제의 건강에 해를 끼친다면 일정 기간 우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형제와 이웃과 사회에 덕을 세우는 일이며 하나님이 받으실 또 다른 차원의 예배이다(마 5:16 참조). 결국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성도들의 모든 삶은 예배로 귀착되어야 한다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