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신앙| 무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_ 김영찬 목사

0
72

생각하는 신앙

 

무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김영찬 목사 | 수원기독호스피스>

 

예의의 뿌리는 언제나 예를 벗어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고요하고 평화한 사랑이다

 

사랑은 무례(無禮)히 행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무례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는 말이다. 무례함이란 격(格)이 맞지 않다, 보기에 사납다, 어울리지 않게 행하다 등 부당한 행동이나 수치스런 행동으로서 사람들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기나 자랑하는 마음 그리고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그 언행은 당연히 무례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타고난 하늘의 본성을 상실한 자들로서 사람에 대한 예(禮)와 도리(道理)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니 못된 짐승의 성질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무례함은 천하고 악한 행동이다.

사랑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상식을 벗어난 난폭한 언행이나 버릇없는 행동을 취하여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 어느 사람이든지 차별하지 아니하고 윗사람에게는 존경심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친절과 겸손함으로 대한다. 품위가 낮아 천한 막말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망언을 하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으며 질서나 지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사랑은 도(度)가 지나치거나 격에 맞지 않는 모든 언행은 본래 행할 줄 모른다. 도(道)를 떠나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사람들이 무례함을 행하는 것이다.

최근 사회 지도층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무례함을 거침없이 행하고 있어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을 주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 가운데 막말과 망언과 비난 등으로 오만을 부리며 무례를 행하면서도 양심이 죽었는지 더 큰소리를 내며 변호 변명을 일삼고 있다. 도무지 당치도 않는 소리로 억지를 부리면서 자신을 스스로 영웅시 하고 돋보이고 싶은 모양이나 상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망감을 줄 뿐이다. 무례함은 본(本)이 되지 않는 지극히 천한 행동인 것을 깊이 인식하여 품위를 잃지 말고 신분의 격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어디 정치계뿐인가? 각계의 지도층으로부터 소시민계층에 이르기까지도 다를 바 없는 무례한 언행들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는 교육계나 종교계에도 다르지 않으니 우리나라의 정신문화 수준이 이렇게까지 저급한가를 의심할 정도이다.

왜 이렇게까지 전반적으로 버릇없고 예의가 없으며 친절함이 사라지고 있는가? 근본적으로 물질만능사상에 젖어 있어 그럴 것이다. 양심과 상식과 법도를 넘어서라도 출세하고 성공하면 타인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 수 있는 힘(力)이 생기는데 그 힘이 자신이라고 착각을 하고 무리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과 재력이 곧 권력이 되어 그 ‘힘’이 사람 노릇을 하고 있으며,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보고 강한 힘으로 약한 힘을 얕잡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버릇이 없고,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고, 비난하고, 폭행하고, 막말을 던지는 것이다. 사람이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힘’이 나라와 세상을 통치하려고 한다.

그 힘의 작용으로 사람들은 갈수록 사나워지고 대인관계의 진정성도 사라지고 있다. 가족 간의 우애와 친구 간의 우정과 이웃 간의 정(情) 그리고 동료 간의 신뢰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마음속에 ‘정’이 담기지 않고 ‘힘’이 담겨 있으니 어린 사람들도 친구나 어른들까지도 얕잡아 보고 함부로 대한다. 돈과 인기와 명예와 권력을 얻으면 더욱 몸을 낮추어 겸손하고 친절하고 공손할 줄 아는 덕(德)이 성숙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잘난 체와 우쭐함과 교만 그리고 무례함만이 성숙한다.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서 정신이요 얼굴이다. 마음이 선하면 선한 것이 나오고, 마음이 악하면 악한 생각과 언행이 나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우주의 천체는 천체 노릇을 하고, 자연의 만물은 만물 노릇하고, 짐승은 짐승 노릇을 하듯이 사람은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의 탈만 쓰면 사람이 아니고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탈만 사람일 뿐 속은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 아니 사람대접을 해주는 척 하고 있는 것일 게다. 억지라도 관계를 유지해야 자리 보존이 가능하기에 거짓으로 대우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대우 받는 것만을 즐기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무례한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면 거짓과 위선을 먹고 사는 사람이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랑은 결코 어느 사람이든지 아래(下)로 보지 않고 동등하고 평등하게 본다. 우리는 조직(組織)을 수직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어 계급 사회로 보지만 본래 조직은 수평적 관계로서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다만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분담하는 직무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계급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와 교회는 언제나 계급의식을 가지고 권위와 권력으로 조직을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때로는 교만이나 무례한 언행이 튀어나와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상대에게는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거나 정죄를 하는 것 자체가 무례요 교만이다. 실수나 잘못이 눈에 띠어도 무례한 호통으로 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권면으로 할 것이다. 그러면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따를 것이다.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 경제적 능력 등을 초월하여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존경은 아니더라도 존중은 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 존중은 천성적으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의 몫이다. 본체가 하나님이신 예수는 자신의 신분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인애와 자비와 사랑으로 만났다. 특히 가난하고 병들어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자주 찾았으며, 정신적으로 방황하거나 갈등을 겪는 사람들도 찾았고, 심지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도 자비와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배반하고 핍박을 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관용할 뿐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무례한 언행을 할 줄 몰랐다. 그러나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과 힘 있는 사람들은 예수에게 무례함을 남발하였다. 교만과 오만의 극치가 곧 무례함이 아닌가? 그래서 무례한 일로 인해 파생하게 될 모든 해(害)를 미리 예방하고 모두와 함께 평화를 나눌 수 있으니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을 사랑의 속성이라 한 것이다. 바른 예의(禮義)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마음, 빈 마음을 이루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빈 마음이 곧 사랑 자리이며 또한 예의의 뿌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禮)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고요하고 평화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