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정암신학강좌| <제2강> 해석의 정당성이 무엇일까? _ 카슨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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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정암신학강좌

 

<제2강>

해석의 정당성이 무엇일까?

 

<도널드 카슨(D.A. Carson) 박사 | 트리니티 신학교 신약학 명예교수>

 

질문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는
신해석학으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가 없고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만을 가질 뿐이다

해석이 너무 복잡해서
우리는 결정할 수 없고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신된 무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두려워 말라 성경에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는 구절이 확실히 많다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진실성과 신뢰 가능성인

형식적 원리와 성경이 말하는 구체적 내용들인

내용적 원리는 늘 연결시켜 봐야 한다

 

우리가 직면한 두 가지 문제를 다루려 한다. 일반적으로 점점 더 우리가 무엇인가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그건 당신의 해석이잖아요” 그렇게 반응들을 한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 주석들을 찾아본다. 그 여러 해석 중 하나를 자기가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면 여러분이 말하는 것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생길 수 있다. “이거 그냥 내 해석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나중에는 어디까지 가느냐면 “나는 장로교인이지만 아마 침례교인들도 옳을 수 있지” 이런 생각에까지 이른다. 또는 “나는 이신칭의로만 칭의를 받는다고 믿지만 이 세상에는 아주 신실한 천주교도들도 많다. 나는 예수님을 분명히 사랑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매우 많은 이슬람교도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상황 속에서 믿는 나만 옳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해석학적 질문에서 의심이 시작됐는데 결국에는 조직적으로 모든 확실성을 허물어뜨리는 입장에 서게 될 수도 있다.

두 번째 직면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김 목사라는 자가 있다고 치자. 미국에 살고 좋은 신학교를 나왔다. 아주 좋은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파트 타임으로 신약학 박사과정 공부도 한다. 훌륭한 설교자이다. 아주 따뜻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간음죄를 범하여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그 집을 팔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런 저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경우 점점 비판적이 되어 감을 볼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미국 북부에서는 6월에 게이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그래서 그는 웹사이트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그가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동성애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네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 않느냐? 왜냐면 이 세상에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이런저런 의문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 사람이 많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정당한 적용을 할 수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에 주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아직도 유효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 스스로는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면 확신할 수 없을 때는 사랑스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게 최선 아니냐? 동성애자들에 대해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반응한다면 결국 동성애나 동성 결혼에 반대하거나 하지 못할게 아니냐? 이런 생각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래서 6월을 Happy Gay Pride Month 라고 이름 붙인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 김 목사 같은 젊은 사람, 복음주의적 신학교를 졸업하고 아주 신실한 설교를 하는 그 젊은이가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압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는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그 상황 가운데서 나는 확신할 수 없다는데 “성경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라고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사람들이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다음에 나름대로의 대답을 하려 한다.

 

첫 번째, 가장 길고 상세한 논변이 나타난다. 이건 좀 복잡한 이야기다. 이 복잡한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결하고 난다면 여러분의 사역은 아주 강력해질 것이다. 버나드 램이 쓴 ‘개신교 성경해석’이라는 책을 50년 전 학생 때 읽었다. 그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하는 모든 원칙을 설명하려고 했다. 문학적 장르에 대해 어떻게 민감하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얘기도 하고 계시록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잠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산상 수훈을 다루는 방식으로 기사의 내용을 다루면 안 된다는 등. 그가 제시한 것은 해석의 규칙들이다. 원칙. 그가 말한 것은 좋은 해석학적 틀을 가지면 본문을 집어넣고 돌리면 바른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잘못된 해석틀을 가지면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석학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주변에 있었던 접근이다. 뭐가 해석의 원칙이냐로 서로 논쟁한다. 그래서 어떻게 연결시킬 거냐? 어떤 이들은 더 잘 돌릴 수 있고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똑 같다.

2차 대전 이후 특히 프랑스, 독일에서 새로운 정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 의심을 시작했다. 나치가 한 게 바로 그런 것 아니냐? 그들은 자기가 옳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해서 몰아내지 않았느냐? 그때 우리는 좀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라고 하면서 이상한 정신이 나타난다.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까지 확신하지 말자라는 정신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몇 가지 예들을 들어 보자. 고전적 해석학에 있어서는 인식자인 내가 본문에 접근한다. 좋은 질문을 가지고 가면 그 본문이 내게 대답을 해 준다. 고전적 해석이다. 직접 들어간다. 그러면 직접 그 결과가 나온다. 해석학을 잘 배워 잘 돌리고 나면 진리가 나온다. 그런데 내 경우에 서양인이며 앵글로 캐나디안 배경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고 해 보자. 만일 내가 나이지리아에 사는 별로 교육을 안 받은 매춘부라고 해 보자. 그녀가 본문에 대해 하는 질문은 내가 질문한 것과 다르지 않겠는가? 그녀가 본문으로부터 얻어 내는 대답은 내가 얻는 대답과는 좀 다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은 그 질문을 제대로 하고 해석학을 통해서 대답이 제대로 나오는 게 아니지 않느냐? 우리들이 하는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느냐? 라고 그들은 말한다.

여기 한국인들이 하는 질문들은 내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여러분이 전혀 하지 못할 생각을 서양인인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집어넣고 해석을 잘하면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것은 질문을 하면서 여기에 뭔가를 덧 씌워 놓은 게 아니냐? 직접 쫘악 가는 게 아니고 돌아가서 본문과 접촉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돌아 나와서 내게 왜곡된 대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들어가고 직접 나오는 그런 게 아니고 어떤 서클을 가지고 있는데 이걸 일반적으로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나에게 어떤 놀라운 대답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 질문을 하는 어제의 내가 더 이상 아니다. 오늘 그 질문을 한다면 어제와 다른 전제를 갖고 질문하게 되는 게 아니냐? 또 다른 것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또 왜곡된 다른 대답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이 서클이 계속된다. 서클을 따라 계속 돌고 돈다. 그래서 결국에 그 본문과 직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진리에 도달할 수가 없다. 여러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만을 가질 뿐이다. 이것이 소위 신해석학(new hermeneutics)이라고 하는 것이다. 1930-60년대 주로 독일,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1960-90년대 그걸 가지고 또 장난했다. 이 신해석학이 극에 달했을 때 ‘안다’고 하는 것 자체의 가능성이 없어지고 말았다. 만일 뭔가를 확실히 안다고 하는 것은 교만의 표시일 뿐이라고 하게 됐다. 그래서 신해석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진리라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는 ‘네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을 잠시 후 하겠지만 오늘날은 이 이론도 그렇게 유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해석학의 면역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아직까지 크다. 이것은 모든 학문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 예를 들어 보자. 미국 독립 혁명 시기에 유행하던 설교를 연구해 봤다고 하자. 그 당시 많은 설교가 성경으로부터 정의, 공의를 되찾는 게 얼마나 중요하냐고 설교했다. 영국이라는 나라가 불공정하니까 우리는 정말 공정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수많은 설교가 그런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미국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는데 캐나다인들이 안 잊었다. 독립전쟁 당시 영국에 반항하려고 하지 않은 많은 미국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영국 치하에 있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영국의 연합된 왕당파라고 한다. 그 시기 그들의 설교를 들으면 왕에게 반역해서는 안 된다는 설교였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런 설교이다. 여기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같은 성경을 읽는데 아주 다른 결론을 가진 두 그룹이다. 설교가 굉장히 다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는 어느 지역에 속해서 지역적인 해석을 할 뿐인가?

그래서 우리의 해석학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에 대답해 보자. 내 친구 중 한 명이 말하는 어떤 경험주의적인 것을 우려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AD 385년 서머나에서 있었던 교회의 회의를 생각해 보자. 그때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다는 정통파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시다라는 오류파 간에 논쟁이 있었다. 이 두 입장은 두 말로 요약된다. 한 입장은 예수님이 성부와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 homoousios)이라는 것이다. 다른 입장은 ‘i’한 자를 더해서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 homoiousios)라고 했다. 하나님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아니시다는 것이다. 그때 서머나에 모인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오류파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유사본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그 둘 중에 어떤 입장을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입장이 나뉘어졌다. 그래서 고백하는데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단언하기를 우리가 조금 괜찮은 무지라는 것을 생각하자 한다. 안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 입장에 따르면 어떤 입장에서든지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이것이 ‘확신된 무지’의 입장이다. 이것에 반항했던 정통주의 신학자들도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뽀아띠에르의 힐러리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결론짓기를 서머나 공회의 결정은 부정확하고 무지의 근거에 있을 뿐 아니라 신성모독이다라고 주장했다. “모릅니다.”라는 것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러면 “여러분이 알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결정할 권리가 없지 않느냐?”라는. 그러므로 당신이 안다고 주장함은 당신이 필연적으로 틀렸다는 얘기다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게 확신된 무지의 위험이다.

번트빗이라는 자의 책을 최근에 읽었는데 교회 공동체 내에서 여성 목사 임직이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논쟁을 다룬 책이다. 그는 아주 흥미롭고 조심스러운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좀 전에 말한 그 확신된 무지의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성경 본문을 아주 잘 다룬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 반대되는 중요한 어떤 본문에 대해서 내리는 결론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라고 한다.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까지 나간다. 우리가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이것이 확신된 무지의 입장이다. 동성애처럼 아주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어떤 것을 말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잘 모르겠어.” 하면서 성경적 입장을 찾아보려고 하는 한 여러분은 아직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A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B교수는 이렇게 얘기하여 서로 입장이 다른데요? 나는 누구의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확신에 찬 무지의 입장에 동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들 모두에 대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성애, 동성결혼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아니다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A교수 B교수가 서로 의견이 다른 상황을 우리는 계속 목도하게 된다. 누구의 입장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아까 제1강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여러분 주변에서 충분한 증거가 없으니까 결정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늘 회의적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충분한 증거들이 없는 어떤 경우들이 있다. 그러면 분명한 증거가 없다는 아주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고전 15장이 성경 전체에서 죽은 사람들의 세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본문이다. 그래서 성경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추측을 해 왔다.

1951년경 어떤 사람이 여러 책들을 사서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연구해 봤다. 그때까지의 해석이 40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엔 훨씬 더 많은 해석이 나타났다. 그 모든 걸 나는 읽어 봤다. 그 중에 몇 가지는 괜찮은 해석들이었다. 나머지는 제거해도 좋을 것들이었다. 그렇게 제거해 버려도 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의 너 댓개의 경우에는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가 모른다. 혹자는 알지 모르지만 나는 모르겠다. 그러기에 교회는 여태까지 성경에 한 번 나타난 것을 교의적 진술에 포함시키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여섯 개의 완벽한 구절이 있고 그 외에도 연관된 여러 구절들이 있어서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는가? 물론 어떤 상황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몰라서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때의 그 논의를 내가 원치 않는 성경 얘기에 직면했을 때 적용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요점이다.

 

두 번째 요점은 아까의 김 목사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아까 얘기 속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충분히 알 수없다.”고 생각하는 목사였다. 그가 제시한 논의는 계속 반복되어진다. 내가 확신할 수 없지 않느냐? 불확실성을 얘기하는 모든 요소들을 다 언급하기 시작한 다음에 그러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하는 이 입장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한 일을 그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만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이 문제를 아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소진적이고 전부 다이고 온전하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느냐? 옳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게 맞는가? 그러므로 참된 지식과 참되지 않는 지식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발걸음이다.

예컨대 누가가 어떤 사람인가 보라. 누가복음 1:1-4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 모든 것을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에게 확신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을 써 보내노라고 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모든 정보를 주고 자세히 다 알려줘서 드디어 내가 하나님과 같은 지식을 가졌다. 라고 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가르칠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한일서 5:16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이것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했다. 여러분이 하나님처럼 전지하게 모든 것을 아는 의미에서 안다라는 말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뭘 안다라고 할 때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나님처럼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나는 내일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일이 안 일어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것도 아신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도 나는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김 목사는 어떻게 하느냐면 우리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뭐가 옳은지 결정하지 말고 그저 사랑으로 대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그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그렇다.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본문이 있다는 건 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신 본문도 있는데 그건 어떡할 건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논의라는 것은 자가당착으로 스스로 자멸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하는 것과 사람의 수준에서 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몇 개의 예를 들겠다.

여기 많은 목사님들이 계신다. 여러분은 신학교를 다녔으니 헬라어를 배웠다. 먼저 알파벳을 배운다. 처음엔 낯서니까 도전적이다. 며칠 동안은 굉장히 쉽다. 그런데 격변화에 가면 어려워진다. 또 제2변화, 제3변화는 어떡할 것인가. 또 분사는 어떠한가. 그래서 신학교 1학년 때 법칙들을 외운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서는 많은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본문 자체를 보면 룰이 잘 적용되지 않음도 알게 된다. 그래서 누가 “헬라어 아세요?” 하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못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누가 그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선배인 여러분에게 신입생이 와서 헬라어가 어렵다며 “선배님은 아세요?” 하고 물으면 “예. 알지요.”라고 확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신학교 연구 교수가 “헬라어 좀 아느냐”고 물으면 “글쎄요…”라며 대답이 잘 안 나온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서도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헬라어만이 아니다. 요리나 계산에 대해서도 같다. 나는 한때 계산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거기에도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 계산 문제 당신은 아세요? 그럴 때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결국 김 목사가 제시한 문제가 바로 이 문제다. 그는 결국 우리를 헤매게 만드는 논쟁을 한 것이다. 아까 말한 해석학적 순환을 생각해보자. 정확히 본다면 결국 해석학적인 나선형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진리에 점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는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떤 것에는 ‘나도 압니다’라는 아주 신실한 대답을 할 수는 있다.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갈 하늘이 있고 무서워할 지옥이 있음을 나는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의 이유, 근거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여태까지 내가 말한 게 뭐냐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없다.”라는 그 주장에 대해 두려워말라는 것이다. 성경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런 구절이 확실히 많다.

 

여기서 쉬운 예를 들어보자. 세 번째 요점이다. 우리가 어떤 때는 잘 모르겠고 불신하는 듯한 상황 속에 있다고 생각하자.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본문 앞에서 당황하기 때문이다. 당황하지 말라는 설교자를 만나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누가복음 16장 지옥에 대해 말하는 구절을 생각해 보자. “솔직히 지옥에 대해 말하기 싫다.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본문이 그렇게 말하니까 여기에 대해 몇가지 얘기해 보겠다.” 그런 식으로 설교했을 때 이 사람은 회중들한테 무슨 얘기를 한 것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스러운 자라고 말한 게 아닌가. 지옥을 안 믿는 사람처럼 행동할 때에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회중에게 전달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설교자는 본문에 대해서 “이것이 이렇다는 것에 대해 죄송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설명해 줘야 한다. 다른 본문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설명해야 된다. 여러분이 그 주제가 싫다고 해서 그 본문을 비껴가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본문에 명백히 있는 것을 여러분이 사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왜곡하게 되고 만다.

 

그 결과로 네 번째 요점인데 출판계에서는 예컨대 무엇에 대한 4가지 관점, 3가지 관점 등의 책들을 많이 발간한다. 천년왕국에 대한 4가지 견해들, 혹은 세례에 관한 두 입장들 등등 많다. 어떤 면에서는 솔직히 그런 책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책들은 아주 전문가가 이런 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들을 소개해 주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책이 여러 입장 중에 정통주의적 기독교 입장이 아닌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천년왕국에 대한 4가지 입장. 이런 책을 생각해보자. 물론 우리가 어떤 입장을 선호할 수 있다. 역사과정에서나 주변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면서 천년왕국에 대해 다른 입장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알 것이다. 요즘에 이상한 변화가 나타난다. 교회에서의 동성애에 관한 두 가지 견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광고문에 이 두 입장이 모두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선택 가능한 것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두 가지 입장 그런 책과 비슷한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이 그건 기독교 책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들에서는 이 두 입장이 다 성경적이라고 한다. 물론 성경으로부터 논의를 한다는 점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게 정당하고 바른 성경주해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출판가들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섯 번째 요점으로 가자. 여태 말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우리는 형식적 원리와 내용적 원리라는 걸 늘 강조해 왔다. 형식적 원리는 성경의 진실성과 신뢰 가능성이다. 내용적 원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의 구체적 내용들이다. 이 둘 중 어느 하나에만 의존해서 여러분의 신학과 신념을 세워서는 안 된다. 예를 들자. 나는 형식적 원리만을 붙잡겠다. 그게 다다. 그런다면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도들도 정확히 그걸 얘기한다. 그런데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해석학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형식적 원리 즉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형식적 원리와 내용적 원리를 연결시켜 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복음주의 신학회가 처음 형성되었을 때에는 신앙고백이 하나만 있었다. “나는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게 형식적 원리였다. 근데 그 입장을 갖고 여호와의 증인이 “나도 동의합니다.”라고 들어온다. 그래서 형식적 원리만 갖고는 무엇이 진리인지를 말하는 데 충분치 않다는 걸 생각하게 됐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확실성과 진리성을 설교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존중하며 신실하게 연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경 그 자체의 내용을 잘 알려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내용적 원리이다.

온 세상에 건강을 지향하는 번영신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설교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이런저런 걸 해 주겠다는 구절들을 인용하며 설교를 한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치유해 주겠다. 이런 얘기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너희가 원하는 것을 구하기만 하면 내가 몇 배로 주겠다는 말씀을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너희 중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면 내가 그들 중에 있어 이루리라. 이런 몇몇 구절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설명된다. 그래서 만일 밥솥이 필요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이런 식의 결론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본문이 그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전혀 생각 없이 모르고 얘기하는 것이다. 더구나 더 악독한 경우는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버리거나 벗어나는 경우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함께 통치하리라. 그 구절로 또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구절, 나를 미워하면 너희도 미워하리라 등의 많은 구절들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런 건강과 번영의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응해야 한다. “형식적 원리에만 매이면 안 된다. 성경을 잘 알려고 한다면 성경의 내용적 원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

 

한 가지만 더 제안하고 마치려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것을 없애 버리려 하는 그런 태도를 언제나 조심하라. 이사야 66장 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들을 내가 돌보려 한다. 그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으로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그런 사람들을 내가 돌아보리라.” 여러분은 기독교 교사나 기독교 설교자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복당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확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확실성이 더해 가면 된다. 궁극적으로는 그 말씀 앞에서 떠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교회의 어떤 사람보다 우월함이 목표가 아니다.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고 말씀 앞에 떠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많은 해를 설교해 왔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 설교를 마친 후 누군가 내게 다가와서 “오, 목사님! 목사님이 설교하는 그런 내용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잘못 설교한 것이다. 오히려 나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반응하게끔 설교했어야 한다. “아~ 그렇지요. 아주 명백합니다. 그 말씀을 진작에 봤어야 하는데…” 이렇게 반응하게끔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그 본문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에서의 설교자라는 것은 어떤 거지가 어느 곳에 가면 더 좋은 음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예우하는지를 말해 주는 사람이다. 겸손하고 심령에 통회하고 말씀 앞에서 떠는 자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할 때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함께 기도하자.

“주님. 주의 입의 말씀은 음식과 음료보다 더 우리에게 답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우리를 바르게 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의 문제를 지적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위해 우리가 존재하도록 하십니다. 이 해석의 문제들을 어떻게 할지를 주 앞에 구합니다. 당신의 이 가장 거룩한 말씀을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읽을 수 있게 해 주소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도록 하소서. 이 나라, 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의 증언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