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특강| 욥기 38:1-42:6의 하나님 말씀의 의미<2> _ 현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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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경신학회 제44차 논문 발표회에 발표된 원고를 2회에 걸쳐 소개하며 편집상 필자의 허락을 받아 각주를 생략한다. 원본을 읽거나 내용 인용을 원하는 독자는 논문발표집이나 차후 발간될 <교회와 문화 44호>를 참고하기 바란다. _ 편집자 주

 

욥기 38:1-42:6의 하나님 말씀의 의미 <2>

<현창학 교수 | 합신, 구약학>

 

<글 싣는 순서>

I. 욥기와 욥기 해석
II. 지혜서 문맥 내에서의 욥기
III. 욥기의 구조

IV. 욥기의 주제

 

‘에차’(הצע)는 하나님의 지혜, 경륜, 운영하시는 우주의 질서인데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신비에 대해 마음의 여유와 자유와 관용과 평안으로 살아감이 지혜이다

의인의 고난에 고민하는 욥에게 대답해 주신 하나님은 그의 고난도 해결해 주셨다

 

IV. 욥기의 주제

  1. 욥기의 주제

욥기의 주제(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 부분에(38:1-42:6) 주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부분은 대화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할 뿐 아니라, 두 번의 하나님의 말씀이(38:1-40:2, 40:6-41:34) 주어지고 나자 욥의 고통이 사라지고 욥의 태도도 일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태의 종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울리(H. H. Rowley)와 앤더슨(F. I. Andersen) 등은 하나님의 말씀이 욥기의 핵심 부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이곳에서 사실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욥이 묻고 책이 묻는 “어째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동문서답식의 질문들만 길게 늘어놓기 때문이다. 욥이 답변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압도적인(overwhelming) 질문 90개를 열거하실 뿐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피면 하나님은 어떤 주제 하나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말씀 부분의(38:1-42:6) 구조로 부터 이것이 분명해진다. 한 단어가 문학단위의 초두인 38:2과 가장 말미인 42:3에 공히 등장해서 소위 봉투구조(inclusio)를 형성한다. ‘에차’(הצע)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단어만 아니라 이 단어를 포함한 문장도 거의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38:2 “지식이 없는 말로 ‘계획’을 어둡게 하는 이 자는 누구냐?”, 42:3 “지식이 없이 ‘계획’을 가리는 이 자는 누구냐?”

‘에차’는 특이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다른 단어들(명사들)은 거의 모두 구상명사(具象名詞)들인데(예: 땅, 새벽별, 바다, 아침, 사자, 까마귀, 산염소, 들나귀, 들소, 타조 등) 이 단어만 추상명사(抽象名詞)이자 개념어(槪念語)이다. 이 점은 ‘에차’를 두드러지게 하고 봉투구조를 형성하는 효과를 배가시킨다. 봉투구조는 동일한 요소를 처음과 끝에 반복시킴으로 문단의 경계를 정해 주는(demarcate) 기능과 더불어 그 문단의 메시지나 모티프를 드러내거나 강조하는 기능을 하는 수사구조이다. ‘에차’가 문학단위의 서두와 말미에 배치된 것은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 부분을(38:1-42:6) 한 단위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것은 이 문학단위의 주제를 드러내 보이는 기능을 한다. 하나님 말씀 부분의 주제가 ‘에차’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 두드러진 단어를 문단의 바깥틀, 즉 서두와 말미에 배치한 ‘구조’가 문단의 주제(모티프)를 ‘에차’라고 가리켜 말하고 있다.

‘에차’는 하나님의 지혜, 경륜 또는 질서를 의미하는 말로서 38:1-40:2와 40:6-41:34의 두 번에 걸친 여호와의 말씀은 이 ‘에차’를 방어하는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우주의 창조, 기상(氣象)의 변화, 별자리의 운행, 야생동물의 생태, 거기다 신비한 ‘브헤못’과 ‘리워야단’의 생김새까지 하나님은 다양한 것들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신다. 이 질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에차,’ 즉 자신이 운영하는 우주의 질서는(자연 질서뿐 아니라 도덕 질서까지 포함) 피조물인 인간이 헤아려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unfathomable) 점을 명확히 가르치려 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욥은 깊은 곤경에 처한 상태에서 자신의 결백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도덕질서(보응의 원리)에 대해 수많은 의문과 항의를 제기했다(3-31장). 하나님의 경륜이 반드시 자신에게 납득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욥이 자신이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많은 말을 한 것에 불과했다(참고, 42:3). 내재된 우주의 도덕질서인 보응의 원리 자체를 하나님이 부정하신 것은 아니겠지만(이 점은 42:7 이하에 나타나는 욥의 회복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그 질서의 운영이 인간의 탐구 능력 밖에 있는(inscrutable) 것이란 점을 명백히 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질서는 하나님이 직접 운영하시는 것으로서 인간이 이해를 훌쩍 벗어나 있다. 예컨대 별자리의 운행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사람에게 “묘성”(황소자리 산개성단)의 흩어진 별들을 모아 묶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삼성”(오리온자리)의 중앙에 띠처럼 모여 있는 세 별을 흩을 능력이 있는가(38:31). 하늘의 각 별자리를 계절마다 제 자리로 이끌어낼 능력이 있는가. 큰곰자리 일곱 개의 별을(“북두칠성”) 하루 밤에 360° 회전시킬 능력이 있는가(38:32). 이런 일을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도덕질서 운영을 이해할 수도 그것에 대해 관여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질서 운영은 인간의 소위 ‘계산적인 지혜’(nachrechnende Weisheit)의 밖에 있다. 인간의 인지/이해 능력이 관통할 수 없다(impenetrable). 극심한 곤경과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의 부재로 인해 인간 쪽의 좌절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이 도덕질서를 운영하시는 경륜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beyond human comprehension) 신비(mystery)인 것이다. 필자는 욥기의 주제를 네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 적이 있다.

인간의 고난, 또는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도덕 질서(또는 그분의 주권-섭리)란 인간의 눈에는 불가해한(unfathomable, inscrutable) 것이다. 고난은 보응의 원리, 또는 반(反)보응의 원리가 답을 할 수 없는 수수께끼(mystery)이다.

자신이 고난을 받는 이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욥을 향해 하나님은 인간은 모든 일에 납득할만한 설명을 얻으며 살 수 없다고 가르쳐 주고 계시다. 오랜 시간 ‘인내’하면(약 5:11) 나중에 깨달을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장당장 다가오는 곤경의 이유와 원인을 다 파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다만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또한 그분의 지혜는 당신의 자녀를 향한 크나큰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는 가운데 감사와 찬양으로 하루하루의 격랑을 이겨나가야 할 뿐이다.

이 점에 대해 퇸싱(Tonsing)의 해설이 도움이 된다. 퇸싱은 하나님의 방대하고 드넓은 우주 경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너그러운 사랑과 존경심”(the free love and respect for God’s freedom)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공간을 지니신 분이다(물론 이 공간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너그러움”을 갖는다는 말은 그 분의 무한한 지혜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것을 의미한다. 혼돈과 갈등도 있고 악과 부조리도 있고 전혀 쓸 데 없어 불필요해 보이는 것도 있고, 심지어 놀이와 기쁨의 요소마저 함께 있는 그러한 질서, 그것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다스리는 질서인 것이다. 우리는 이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본연의 우리의 모습인 피조물로 돌아가서(참고, 42:6)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너그러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다. 마음에 여유와 자유와 관용과 평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이다.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지혜가 이것이다.

 

  1. 욥기의 주제의 종합적 정리

앞의 1에 정리한 내용은 38:1-42:6 하나님 말씀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보충하여 욥기 전체를 조관하는 입장에서 욥기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

욥기는 신정론(神正論)의 이슈를 깊이 다루는 책이다. 신정론(theodicy)은 하나님(theos)과 정의(dike-)가 합쳐진 말로 인간의 고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義)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말한다. 신정론이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큰 신학적 이슈가 되고 성경의 한 책이 이 문제에 전적으로 몰두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브루지만(Brueggemann)은 욥기를 ‘사회적 악,’ 또는 ‘사회적 과정’이라는 초점을 가지고 해석하면서, 욥기를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person and character of God)을 묻는 신정론에 국한하여 이해하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운 사변의 놀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필자는 브루지만의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정신세계를 이해한다면 그러한 비판은 나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스라엘은 비이스라엘인이 보면 과도하다 할 정도로 ‘의(義)’의 문제에 몰두해 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신(창 15:6) 것을 필두로 구약 성경의 신앙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의”의 관계를 중심으로 표현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위기를 한 예로 들 수 있는데, 레위기는 책 전체가 의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고 있다. 제사를 통해 의를 확보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하고(1-10장), 성결을 통해 의를 확보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한다(11-27장).

이스라엘의 정신이 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그들의 기도책인 시편을 볼 때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시인들이 자신의 의를 내세움으로 하나님께 결백 증명을 구하고 안전한 교제의 터를 확보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예도 수없이 많지만, 한두 가지 예로 충분하다: 시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42:7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의에 대한 대단한 관심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 소중한 관심은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의를 확보해 주시는 데에 이르기까지 긴 구원 역사의 끈질기고 강력한 추진력(drive)이 되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의에 대한 관심은 성경의 구속 역사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한 바른 것이었다.

우리는 욥기에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뿌리칠 수 없는 관심의 일단을 본다. 이스라엘의 의에 대한 대단한 관심은 어찌 보면 욥기에서 과격한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특수한 상황(의인의 고난)을 만나서 그들의 의에 대한 관심은 “과연 하나님은 의로우신가” 하는 질문으로까지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질문을 한가하다거나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질문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이스라엘의 진지한 관심이 치열하게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정론이라 생각된다. 철저한 신앙의 사람들의 철저한 신앙의 관심에 대해 하나님은 뿌리치지 않으시고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바가 없는 것이 아니나) 진지하게 답해 주셨다. 비록 그 질문이 감히 자신(하나님)의 의까지 묻는 도발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답해 주셨다. 그것이 욥기이다.

신정론의 질문에 대한 욥기의 답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 물론 욥기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은 난해한 책이다. 그런 만큼 욥기는 열려있는 책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겸손도 동시에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정리하는 것들은 절대 확정적인 것들이라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몇 개의 메시지들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다음 네 가지 정도가 이 시점에서 본고가 정리할 수 있는 욥기의 주제이다.

(1) 인간의 고난, 또는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도덕 질서(또는 그분의 주권-섭리)란 인간의 눈에는 불가해한(unfathomable, inscrutable) 것이다. 고난은 보응의 원리, 또는 반(反)보응의 원리가 답을 할 수 없는 수수께끼(mystery)이다.

(2) 인간의 눈에는 불가해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운 통치자이시다. 악과 혼돈을 용납지 않으시고 제거하시며 궁극적으로 정의를 구현시키신다.

(3) 인간에게 불가해한 고난이 오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고 인간은 그분의 ‘안 계신 것 같음’(absence) 혹은 ‘숨겨져 있음’(hiddenness)을 경험하게 될 때에도, 그러나 그 분은 거기에 여전히 계시다(He is still there)! 기도에 참으로 오랜 인내가 요구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당혹과 의혹을 넘어 자기 백성과 여전히 함께 계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지탱하시는 임재(the sustaining presence of God)를 꾸준히 소유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함께 계시어서 자기 백성을 여전히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불가해한 고난의 시간, 그 시간은 참되이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일 따름이다.

(4) 하나님의 운영은 불가해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운 운영을 하고 계시다. 이 의로우심은 어떤 궁극적인 시점에 가서 보응의 원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의를 소중하게 간직하시고 결국 이를 갚아 주신다. 아무리 이해되지 않는 갈등과 고통의 과정이 있다 하더라도 의인의 고난은 여전히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여 있으며, 고난자의 의(義)는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신다.

의인의 고난에 대해 고민하는 욥을 만나주시고 대답해 주신 하나님은 또한 욥의 고난도 말끔히 해결해 주셨다(42:7-17). 욥의 고통 자체가 해소되므로 욥이 그의 응수에서 제기한 요소들, 즉 (1)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2) ‘친구들에 대한 질책’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적절한 시간에 고난 자체도 제거해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 준다. 그 제거 역시 어떤 알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 된 것은 아니다. 언제 온 것인지 어떻게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그저 회복이 다가왔다(42:10). 힘들게 했던 과거의 그 심각한 고민과 혼돈의 뿌리가 일순 사라져 버리고, 풍부한 복락의 날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42:12-17). 이것은 또 하나의 신비인데, 하나님은 큰 자비와 긍휼로써, 갈등하며 인내하는 자에게 “주께서 주신 결말”(약 5:11)을 보게 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끝>

 

* 현창학 교수: 한국성경신학회장. 서울대 물리학과(B.S.) 총신대원(M.Div., Th.M.) Calvin Theological Seminary(Th.M. 이수) University of Wisconsin – Madison(M.A., Ph.D.). 저서로 『구약 지혜서 연구』, 『선지서 주해 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