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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성만찬에 대한 이해

<이남규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말씀과 성례 둘 다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면에서는 같다. 그런데 말씀은 믿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굳게 하기도 하지만, 성례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고 믿음을 굳게 한다.”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이 표가 말하는 내용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1. 말씀과 성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말씀이다. 우리는 전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이 이 들리는 증거 외에도 보이는 증거가 있다. 보이는 증거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굳게 하기 위해서 보이는 증거를 예식으로서 제정하셨기 때문에 중요하다. 교회는 이 보이는 증거를 성례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다른 말로 성례를 보이는 표와 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듣는 증거(말씀)가 보이는 증거(성례)보다 앞선다. 말씀과 성례 둘 다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면에서는 같다. 그런데 말씀은 믿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굳게 하기도 하지만, 성례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고 믿음을 굳게 한다.

성례는 이미 믿는 자만, 즉 말씀을 들어 믿는 자만 참여한다. 게다가 말씀을 들어 믿음에 이르렀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성례에 참여하지 못한 신자도 있을 수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회심한 옆에 있던 강도는 말씀에는 참여했으나 성례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성례는 말씀 없이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날 수 없으므로 말씀의 증거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한다. 말씀과 함께 말씀(들음으로)처럼 성례(봄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한다. 한편 말씀을 듣는 것과 함께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믿음이 일어나듯이, 성례에서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만 믿음에 유익이 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만 전달되는 말씀이 유익하다고 해서 말씀이 전달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듯이, 아니 오히려 성령님께서 그 전달되는 말씀에 역사하시므로 그 일을 중히 여겨 수고를 다하듯이, 성례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므로 마땅히 중히 여겨야 한다.

나아가 말씀이 성례보다 앞선다고, 성례를 무시할 수 없다. 성례를 무시하는 자는, 성례를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자다. 성례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성례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주시는 복음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증거인 성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긴다. 성만찬을 업신여겨 잘못 사용한 고린도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셔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를 중요하고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1. 성례전적 연합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을 통해 제정하신 성례는 두 가지, 곧 세례와 성만찬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정하신 예식이 세례이다. 그리고 성만찬 예식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잡하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가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이 두 예식의 외적인 모습만 본다면 세례는 물로 씻는 모습이고, 성만찬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외적인 모습을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례 가운데 보여지는 외적인 모습은 분명히 어떤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이 외적인 모습은 말하는 내용을 갖기 때문에, 표라고 부른다. 이 표는 표가 말하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세례에서 물로 씻는 것은 죄 씻음이란 내용과 연결되어 있고, 성만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표와 이 표가 말하는 내용과의 연결을 교회는 성례전적연합이라고 불러왔다.

이 성례전적연합에 대한 이해 때문에 교회사에는 여러 가지 논쟁이 있게 된다. 즉 질문은 이것이다: 표와 표가 말하는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이 질문에 대한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표가 사제가 말을 할 때(예를 들어 “혹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Hoc est enim corpus meum)),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한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로 말해져도 상관이 없다. 그래서 마치 주문과 같다.

한편 루터주의자들은 ‘표가 말하는 내용’이 표와 함께 공간적으로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떡과 잔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공간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루터주의자들을 향해 반대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인 살과 피를 우리의 육신의 입으로 먹고 마시는 것(로마가톨릭과 루터주의의 의견은 이 면에서 결국 똑같다)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와 루터주의는 성례전적 연합이 물질적인 연합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는 연합이라고 이해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인 연합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이해하였다. 이 때 상징적이라는 것은 내용과 실체가 없는 상징이 아니라, 그것을 분명히 포함하는 상징이다.

마치 목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말하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실제적으로 전달되듯이, 목사가 예식을 집례할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예식이 말하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실제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성례를 말씀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말씀을 통해 성례의 외적인 모습(표)은 표가 말하는 내용(실체)과 상징적으로 연합하여서(성례전적 연합) 구원의 은혜(복음의 약속)를 본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개발된 내용이 아니다. 같은 내용이 이미 처음부터 교회 안에 있었으나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을 더 세밀하고 정돈되게 표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이 없이 물은 그저 물이고, 요소에 말씀을 더할 때 요소가 성례가 된다고 말했다.

 

  1. 츠빙글리와 루터

 

종교개혁 후 개신교 진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거절하는데 있어서는 동의했다. 그러나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 이견이 있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루터와 츠빙글리가 마르부르크에서 만나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문서(Die Marburger Artikel 1529)를 작성했다.

여기에 보면 그들이 동의한 점은 다섯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빵과 포도주 두 가지 요소를 사용해야 한다. ■미사는 거절한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의 성례이다. ■몸과 피에 영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약한 양심이 성령에 의해 믿음을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육체적으로 빵과 포도주에 있는지에 대해선 합의하지 못했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한다는 것은 미신과 우상숭배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공간적으로 실재적으로 있다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츠빙글리의 입장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만찬은 미신화 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은 내몸이다”(hoc est corpus meum)에서 “이다”(est)를 “상징한다”(significat)라고 해야 바른 성경해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몸이다고 하셨을 때, 이것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몸을 “상징한다”라고 읽었다.

그러나 루터가 생각할 때, 성만찬에서 인성을 빼버린 채 단순한 상징이나 기념에만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현존을 부정하게 되면, 성육신 하셔서 구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현존을 끝까지 고집했다.

‘이다’(est)는 루터에게 있어서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것이다. 루터의 고민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위격적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츠빙글리도 동의하고 칼빈도 동의하고 다른 개혁신학자들도 동의한 내용이다. 오래전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위격적 통일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인성이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이 분리된다는 것까지 주장한 것은 루터의 오해다.

루터주의자들은 공재설을 위해서 신성의 속성을 인성이 받아서 편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편재한 인성이 떡과 잔에 있어,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의견을 츠빙글리는 받을 수 없었다. 유한이 무한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인성이 신적속성인 편재성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한 일은 신성에 돌려지고, 신성이 한 일이 인성에 돌려진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성경이 그렇게 하고 있다), 신성의 속성이 인성에 돌려지고 인성의 속성이 신성에게 돌려진다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화, 분할, 분리가 없이 위격적 통일을 이룬다는 칼케돈신경(451년)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1. 칼빈

 

칼빈은 츠빙글리의 이해에 머무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기념으로 이해해서 단순한 신앙고백의 행위에 머무르거나,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츠빙글리와 칼빈은 성만찬론에서 분명한 차이를 갖게 되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을 거절하는데 있어서 루터에 반대하고 츠빙글리와 동의했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한 것은 아니다. 바빙크는 칼빈이 츠빙글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한 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츠빙글리는 성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신자들이 성찬 가운데서 행하는 것 뒤로 너무 많이 물러나게 하여 결국 성찬을 일방적 고백의 행위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을 다만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음을 신뢰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판단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칼빈은 이제 루터 편에서 서서 그리스도가 비록 육체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성찬 가운데 현존하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과 피를 포함한 자신의 전 위격으로(met zijn ganschen persoon) 참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waarachtig en wezentlijk) 성찬 가운데 현존하여 성도들이 즐긴다고 말했다. 칼빈과 루터 사이의 차이는 이 현존의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현존의 방식에 대한 것뿐이다.”(GD IV, 542.)

 

여기서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이 성령의 역사없는 단순한 기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위의 인용한 마부르크 논제(Marburger Artikel 1529)에서도 나타나듯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믿음의 강화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츠빙글리와 칼빈의 성찬론의 차이가 성령의 역사 없는 단순한 기념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게다가 츠빙글리도 그리스도의 영적인 현존을 말한다. 츠빙글리에게 그리스도의 육체의 현존이 영적일 때, 이 의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CR 92, 587). 브렌츠가 루터편에서 말씀의 능력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설명했을 때, 츠빙글리의 반응은 믿음이 현존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본성으로 현존하게 되지 않듯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본성으로 현존하게 되지 않는다”(CR 92, 587).

즉 츠빙글리에게 성만찬은 신자들의 고백의 행위요 믿는 행위에 머물렀다. 칼빈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전위격의 실제적인 현존과 신자들의 그리스도의 은택을 누림과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 있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을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Inst. 4. 17. 5), 성만찬이 다만 외적고백의 표라고 하는 자들(Inst. 4. 17. 6),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의미가 성령에 참여한다는 것이라고 하면서 피와 살을 무시하는 자들(Inst. 4. 17. 7)과 거리를 둔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성례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우리가 갖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시야 안에 나타나 있고 손으로 만져질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참되게 제시된다고 확실하게 생각되어야 한다.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이것은 내 몸이라는 이 말씀은 우리를 속이거나 놀릴 수 없기 때문이다.”(Inst. 4. 17. 3)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원칙은, 곧 주께서 세운신 상징을 볼 때마다 표된 것의 사실이 거기에 있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확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보이지 않는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인치기 위해 보이는 표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몸의 상징을 받았을 때 역시 바로 몸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히 확신해야 한다.”(Inst. 4, 17, 10)

 

 

  1. 개혁교회의 입장

 

개혁신학자들은 이런 관점에 만족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성경을 잘 드러내는 것이고, 교회가 예전부터 갖고 있었던 성례전적연합의 이해와 잘 맞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개혁교회는 성만찬에서 물질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있는 그리스도의 살을 육신의 입으로 먹는 다는 것을 분명히 거절한다. 그러나 성만찬을 단순한 기념과 고백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즉 성례전적 연합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표현을 한다.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이 표가 말하는 내용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례전적 연합(즉 ‘표’와 ‘표가 말하는 내용’의 연합)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물질적이거나 장소적이지 않은 성례전적 연합에 의한 진술이다. 이런 성례전적 연합에 의한 유익은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성만찬의 유익을 주신다.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성례전적 연합에 의한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함께 하여서 우리에게 주어질 뿐 만 아니라, 성만찬예식 가운데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전 위격적으로 함께 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전 위격이란 죽기까지 낮아지셨다가 하늘에 오르셔서 그 인성은 하늘에 있으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이다. 신성이 한 일은 그의 전 위격에 돌려지므로 이제 그리스도 전 위격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정리하여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성은 하늘에 있으나 신성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 예식에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예식 가운데서 믿는 우리에게 성례전적 연합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말하는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얻으신 구속과 그 모든 은택의 실체를 우리에게 주신다.

 

이런 관점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표현되어 있다. 칼빈의 초안을 가지고 작성된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말한다: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 거기에서 머무실 것이지만, 그가 신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믿음으로 받게 되는 그의 몸과 피의 본질로 우리를 먹이시고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다.”(Confessio Gallicana, 36)

 

벨직신앙고백서는 말한다:

 

“우리가 믿음(이것은 우리 영혼의 손과 입이다)으로 우리 영혼에서 참된 몸과 참된 피를 받는다”(Confessio Belgica, 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뗀 빵을 먹고 잔에서 마시우듯이 그렇게 확실히 그의 살과 피를 신자들에게 먹이고 마시운다는 것을 어디에서 약속하셨는가?”(HC, 77)

 

  1. 성만찬 실행에 대하여

 

두 요소를 합당하게 받는 것이 옳다는 점에서 개혁신학자들만이 아니라 루터주의자들도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 잔을 마시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먹는 빵과 음료 두 요소가 성만찬에서 주어져야 한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육체적 생명이 빵으로 유지되듯이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혼이 영양을 공급받아 영생에 이른다; 빵이 몸의 배고픔을 없애주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공로가 영혼의 배고픔을 없애준다; 빵이 배부른 자가 아니라 배고픈 자에게 유익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능력과 공로도 의에 주린자에게 유익하고 자기 자신의 의로 헛배 부른자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 많은 자에게 배분되는 하나의 빵이 일치의 표이듯이, 많은 자에게 제공되는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선한 뜻의 표이며 우리들 상호 간의 사랑의 표다; 하나의 빵이 많은 곡물로 이루어지듯이, 많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한 하나의 몸이다(Bucanus).

그런데 빵과 포도주가 없는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빵과 포도주 대신 그곳에서 사용되는 땅의 음식물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도 용납되었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이 빵과 포도주 외에 다른 음식에 대하여 용납하고 있을 때, 그것은 부득이한 상황 아래서의 허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지 일부러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혀 가질 수 없을 곳에서 허용되는 것은 옳다는 정도이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를 흔히 구할 수 있는 우리가 다른 것을 일부러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목사가 이 두 요소 빵과 포도주를 취하여 성별하게 된다. 목사가 빵과 포도주가 이제 거룩한 사용을 위해 정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통 기도와 함께 주의 만찬 제정의 말씀을 설명한다. 그러면 여기서 일상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 된다. 이것을 성례전적 연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땅의 것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변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일상적인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면서 성례를 위한 목적과 사용을 위해 구별된다.

성별 후에 목사가 빵을 떼어 배분하게 된다. 빵을 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첫째, 주의 빵이 자신에게 떼어지듯이, 그리스도의 몸이 확실히 무거운 고난의 고통가운데서 또 영혼이 몸에서 분리됨으로써 그 자신들을 위해 떼어지듯이 찢겨졋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한 빵에 참여하는 모든 많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한 몸과의 교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빵을 떼는 것은 주의 만찬의 본질(essential)이며 형식(forma)에 속해 있으며 생략될 수 없다. 그래서 동전모양의 얇은 과자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성례전적 연합에 의해서 성만찬 예식 전체가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빵이 말씀의 종에 의해 전달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전달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주의 떡을 당신에게 주는 것을 볼 때에 목사의 손이 너에게 내밀어졌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리스도의 손이 네게 내밀어진 것이다. 빵이 전달되는 것은 복음의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가 전달되는 것이고, 빵이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빵이 몸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영혼의 입 곧 믿음에 들어가는 것이고, 빵이 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 전달될 때에도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신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Polanus).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의하면 성만찬 예식의 표가 떡과 잔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 의해 떼어지고 나누어지고 신자가 받고 맛보는 전체 예식에 있다. “… 첫째,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분배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그의 몸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드려지고 찢기셨으며 그의 피도 나를 위해 쏟으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확실한 표로서 주님의 떡과 잔을 내가 목사의 손에서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확실히,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로써 나의 영혼을 친히 영생에 이르도록 먹이시고 마시우실 것입니다”(HC 75). 여기에서는 수동적 시각(떼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을 본다)과 적극적 촉각과 미각(떡과 잔을 받아 맛본다)이 사용된다.

 

마치는 말

 

성찬은 신자만이 참여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찬에 참여할 자들을 신자들로서 제한하면서, 신자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한다.

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할 때 슬퍼하고, 신뢰하고, 사모한다. 이 자세는 성찬에 나아가는 자들이 기억해야할 사항들이다. 자기 죄 때문에 슬퍼할 것,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슬퍼하는 그 죄가 사함을 받은 것과 남아있는 약한 것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덮인다는 것을 신뢰할 것, 그리고 믿음이 강해지고 삶이 더 교정되기를 소망할 것이 성찬에 나아가는 자세다.

죄를 슬퍼만하여서 나아가지 못하는 자는 혹 자신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전성을 의심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칭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화까지, 즉 더 강한 믿음과 더 나은 삶의 교정에 대한 소망을 포함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의 마땅한 자세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전혀 유익하지 않고 해가 된다.

이 예식을 잘 수행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이 예식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성찬을 권징과 연결시켰다. 불신과 불경건이 고백과 생활에서 드러나는 자들에게 성찬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에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더럽혀질 때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회중에게 임한다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지적한다(HC 82). 그래서 교회는 교회권징이라는 천국열쇠를 사용해야 한다. 이 교회권징을 위해서 치리장로가 필요했고 당회가 구성되었다.

결국 성찬, 삶, 권징, 교회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교회가 성찬을 회복한다는 것은 권징을 회복할 때, 또 권징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정치가 회복될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성찬이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