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두려움이 빠진 신앙, 그게 두렵다

0
26

사설

두려움이 빠진 신앙, 그게 두렵다

 

오늘날 성도들의 심각한 현상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두렵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버젓이 되풀이 저지르고들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자도 예외 없는 현상이다. 개중엔 그게 얼마나 잘못인 줄 미처 모르고 저지르는 일도 있고, 잘못인 줄 알지만 하나님은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고, 잘못을 되풀이 하면서 회개만 반복하는 이들도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포기 못해 돌이키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줄 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을 그저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사랑의 하나님 바로 그분이 심판 주 하나님이란 지식은 있지만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두려움이 없는데 순종이 따를 턱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한 순종에서 드러나는데 성도들이 이를 외면한다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긴 하지만, 벌은 내리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는 신앙, 그게 바로 세속신앙이다. 하나님을 나의 도우미 정도로만 생각하는 신앙은 기독신앙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 자리를 넘보는 망령된 탐욕이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 예컨대 부름 받은 자로서의 책임, 보냄 받은 자로서의 책임, 구별됨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라 하겠다. 우리가 그 책임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그것을 망각하거나 훼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게 성경의 증언이다. 그 문책이 여간 엄중한 게 아닌데 우리에겐 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게 놀랍다. 인간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때마다 회개만 하면 하나님도 그냥 웃고 지나치실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처럼 미련하고 무모한 인생은 없을 것이다.

부름 받은 자는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말씀 순종은 우리를 빚으시고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아담 하와는 단순히 그 말씀을 한 번 어겼을 뿐인데 영혼의 죽음과 에덴에서의 추방을 당했다. 사람이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 그 소속을 증명 받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 죄가 되는 셈이다. 창조주의 말엔 창조의 능력이 실려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함은 그 말씀이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함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그러면서도 온전한 말씀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보다 말씀을 욕되게 하는 일은 없다. 이러고도 하나님에 대한 간구와 찬양만 있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게 오늘 우리의 안타까움이다.

보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다. 타락한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실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작정헌금을 속였다가 부부가 함께 징벌 받았다. 좀 지나친 것 같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거짓이 용납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신약시대가 시작될 때 그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시는 결정적인 교훈이 바로 이 대목이다. 교회와 성도가 만약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거짓과 조작과 왜곡에 익숙하다면, 보냄 받은 자로서 그보다 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은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맡은 직분을 방치하여 그 직분을 욕되게 하거나, 주님의 십자가를 이익의 방편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선 그럴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선 결코 있어선 안 될 일들 아니겠는가!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해 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 이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드러낼 만한 직접적인 고백은 없기 때문이다. 그 고백에 실패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가 된다.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지 말라’고 엄중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은 그 바쳐진 물건을 가로챘다가 역시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치렀다. 엄중한 구별로 요구받은 것으로는 안식일과 십일조도 있다.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실 시간(안식일)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구별된 물질(십일조)의 극히 일부라도 내가 가로챘다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그러고도 하나님의 복을 기다린다면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라 하겠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안식일과 십일조만이 아니다. 교회 성물도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다. 교회 비품이나 용품을 사유화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려면 담당부서에서 정식 용도폐기 결정을 거치는 게 옳다.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 두려움마저 없다면, 그로 인한 인간의 기고만장함을 당할 재간이 없다. 자신의 허물을 인식하지 못한 채 남을 정죄하기에 능숙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빠진 신앙, 이것보다 더 두려운 건 없다. 인간 황폐에 대한 두려움보다 때가 되어 들이닥칠 하나님의 불심검문(不審檢問)이 더욱 두려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