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적 지식의 위험성
< 김성주 목사·서울언약교회 >
“말씀의 본의 깊이 접촉해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기를”
“말씀의 충만만이 교회의 참된 부흥 유일한 잣대 되어야”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석된 말씀 안에서 누리는 성도간의 영적 교통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일환이며 동시에 지상에서 선취(先取)적으로 맛보아 누리는 천상적 교제의 실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말씀을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관점(성경신학/언약적 구속사)으로 바르게 배우고, 깨달아 이를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확증된다.
1. 자기중심 신앙에 빠져있는 사람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통상적인 기독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정작 신앙의 근간으로 삼아야 할 성경에 대해 생각보다 등한히 여긴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등한히 여긴다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교회적 전통과 개인적인 경험을 중시하며 이를 의존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결과는 성경적인 지식과 정보를 상당 부분 습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방편적이고 부분적이며 파편적인 것으로 인해 총체적인 성경 계시관에 접촉되기에는 역부족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성경에 대한 지식과 교리체계가 일관성과 통일성 있게 정립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 하나님의 본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십인십색의 관점과 견해의 차이를 띠는 것이 현실이다.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부분적으로 만져보고 코끼리의 모양을 나름대로 통나무 같다느니, 큰 담벼락 같다느니, 아니면 큰 부채와도 같다느니 하며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얘기하듯이 말이다.
이런 경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과 본의에 대한 왜곡이다.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본래적인 의미에 미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의적(恣意的)인 숭배 신앙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이후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께서 내신 지식의 체계와는 무관한 왜곡된 자기중심적인 신앙관에 깊이 빠지게 된다.
성경은 이를 불복종적(롬 10:2-3)이며 불법적(마 7:21-23)인 신앙으로 간주해 엄히 경계시킨다. 신앙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열심을 빙자한 자기 열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2. 말씀의 순수한 전파는 목사의 사명
우리의 신앙관이 이처럼 하나님의 본의와는 무관하게 정도를 이탈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아무래도 자신의 신앙관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기존의 신앙적 전통과 습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답습하는 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처음부터 ‘성경이 말씀하는바’(What the Bible says)에 대한 총체적인 성경 계시관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정립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현상의 일차적 책임은 말씀을 맡은 목회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교회 속에 말씀의 수종자로 목사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말씀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바르고 건강하게 이루어가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엡 4:11-12). 그런 의미에서 ‘말씀의 순수한 전파’가 객관적으로 확인된 바른 교회에 속한다는 의미는 가히 구원론적 근거로 기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어느 교회에 속할 것인가, 어떤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의 문제는 성경적인 바른 구원관과 신앙관 및 바른 신관을 형성하는 일에 있어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로 제기된다.
우리의 신앙적 열심이 자칫 성경을 곡해해 왜곡되게 배운 결과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적용시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불의함과 불법함으로 판정된다면 이보다 후회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롬 10:2-3, 마 7:21-23). 이런 이유로 바른 교회에 속해 총체적 관점에서 체계화된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양육 받는 일은 열심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딤후 3:16-17, 2:15, 요삼 4, 롬 10:2-3).
3. 거듭난 신자의 유일한 양식은 말씀뿐
신앙은 단순히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소용되는 종교적 교양이 아니다. 종교적 문화 활동은 더욱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살아가는 천상적인 생명활동이다.
영생하는 삶 그 자체란 의미이다. 비록 여기 지상에서부터 소유해 누린다는 제한적 성격상,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한 요소가 없지 않을지라도 종말론적 관점에서는 이미 여기서부터 천상적 생명에 이미 접촉돼 그 실질을 예비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원리 하에서 천국은 죽어서 영혼이 가는 곳이 아니다. 거듭난 인격이 살아서 여기서부터 이미 그 실제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현재적인 나라의 개념이다(마 12:28-29, 눅 17:20-21). 이런 경험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인 성경말씀에 체계적으로 깊이 접촉되는 것을 통해 보다 풍성히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호 6:6)는 성경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씀을 배우는 일에 예외 적용은 없는 셈이다.
모름지기 참 성도란 다른 무엇에 앞서 바르게 해석된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데서 성도로서의 정체성과 진정성이 확인된다고 성경은 증언한다(시 119:77, 92, 97, 103, 105, 127, 131, 요삼 4절).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가능한 대로 말씀을 배우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정상적인 영적 성장과 성숙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딤후 3:16-17, 벧전 2:2, 딤후 2:15).
이런 원리에 근거해 성경이 말하는 교회성장의 본질은 물량적이기보다는 말씀의 흥왕, 곧 말씀 충만에 집중된다. 여기서 말씀의 흥왕과 충만이란 말씀의 본의에 깊이 접촉돼 이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전인적으로 변화된 가치관의 삶을 가리킨다. 곧 자기중심적이며 세상 지향적이던 삶의 자세가 하나님 중심적이며 천상지향적인 삶의 방향으로 전도(顚倒)되듯이 말이다(마 6:33).
이처럼 말씀의 본의가 총체적인 계시의 관점에서 바르게 정립되고,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비로소 성경적인 신앙관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인격적인 관계가 재정립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