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노회 주최 관상기도 포럼 참관기|
관상기도를 과연 한국교회에 적용할 수가 있는가?
< 이차식 목사, 덕일교회 >
한국교회 최초로 관상기도 찬, 반 포럼이 2009년 12월 14일에 대한예수교 장
로회(합신) 경북노회 주최로 대구동흥교회당에서 열린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
다.
필자는 두 분의 전문 강사인 최승기 목사(호남신학대학교)와 림헌원 목사(예
장합동 한돌교회)의 강의를 긴 시간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을 수 있
었다. 그 분들의 노고와 열띤 강의에 감사를 표하면서 필자의 생각에 깊은
우려가 되었던 부분들에 대해서만 참관후기를 기술해 보고자 한다.
1. 기도의 양식이나 방식에 대한 갱신이 필요한가?
발제에서 최승기 교수는 ‘한국교회는 기도의 정의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
을 전제’하고 전형적인 관상기도의 이론만을 주로 소개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 기도의 갱신을 위하여 관상 중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진위여부
분
별을 위한 영성지도자 활성화와 지도자 배출이 한국교회의 기도 갱신에 큰
공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기도가 이미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순종하지 않으려 하거나, 이미 확
정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또 다른 내 안에서의 어떤 음성을 듣고자 하
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결코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관상을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즉각 순종하였다.
주님의 교회에 어떠한 새로운 기도 양식이나 방식에 대하여 갱신이 필요하다
면 적어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오고 오는 교회에게 표본
으로 제시하신 기도의 양식이 있다. 주님의 이 지침은 우리가 무시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지침이 없이는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
할 수가 없을 만큼 심히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법으로 검증을 받아온 개혁주의 신조들
이 있다. 그 신조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 등을 알아
야 한다. 그러한 성경과 신조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다면 잘못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으며 한낱 위선적이고 기계적인 단어의 나열에 불과한 기도가 될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그런데 최 교수의 경우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교회들이 가르치고 전수해
온 기도의 내용이나 양식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으며, 성경적인 근거
구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혼합종교로의 전락
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우려를 금할 길이 없었다.
우리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 로마 카톨릭에서의 관상기도를 배워
야 할 필요가 있는가?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과 마찬 가지로 성모 마리
아와 성인들 및 천사들에게도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외에 마
리아, 성인, 천사들이 중보자인 것이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중보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반 기독교적이
며, 우상이라고 생각한다.
2. 지금도 직통계시가 지속되고 있는가?
관상기도는 로마 카톨릭, 중세
신비주의, 힌두교, 불교의 가르침과 관련이 있
는 혼합종교의 새로운 양태로 신비주의, 인본주의, 개인 및 집단 최면술이
포함된 자기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관상기도 방식 중에서도 ‘들
음의 신비 체험’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
이 사실이라면 이미 확정된 계시관에 있어서 심각한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지금도 성경의 계시가 계속 된다면 이미 확정되었다고 선언한 성경의 표준
과 그 권위는 어떻게 되며, 우리의 사고와 생활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해
야 한단 말인가. 관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법이 되지 않
겠는가.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제켜두고 계속 새롭게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논리를 주장하는 집단은 이단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된 이후 오늘날도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인지, 자아의 소리인지, 귀신의 소리인지 누가 판단할 것인
가. 그것을 분별할 잣대와 능력과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관상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영적지도자에게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
나 이러한 가르침은 로마 카톨릭에
서나 주장하는 논리이며 우리 주님이나 사
도들은 결코 가르친 적이 없는 교훈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하나님이 성경
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가 의미하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 놓지 않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
님의 말씀 위에 교회의 권위있는 해석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이러한 거짓된 교훈은 관상기도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강조된
다.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것이 사탄에게서 왔는지 하나님께로
서 왔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하고 분간하기 위하여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은 사탄이 만들어 낸 오묘한 거짓말이다.
개혁주의의 모든 권위는 성경을 최종 권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나 여호와 증인은 성
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임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성경만으로 하나님의 계
획을 알 수 없으니 내가 이교처럼 관조(관상)을 하여 계시를 획득하려는 것
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성경과 성경을 읽는 사람 사이
에는 어떤 사람도 해설자로 끼
어들 필요가 없다. 기도에 있어서도 영적 지도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성경 자체로 해석되는 것이다. 성경이 하
나님의 계시임을 부인 할 때, 성경 위에 인간을 두게 되는 오류가 생기는 것
이다.
관상기도 옹호자들은 자기가 수 십년동안 한 기도는 두 인격체 간의 대화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방적인 넋두리며 자기 도취적인 중얼거림이
었다고 한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함으로써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안에 충
만히 거한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이 최종적으로 이를 곳은 어디인가. 결국
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처럼 로마 교황청과 힌두교
불교 모슬렘교 유대교 등의 모든 종교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종교들
도 결국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종교다원주의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그들은 대부분 성경의 영감 무오나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
천, 재림 등을 믿지 않는다. 반면에 교황의 절대 무오설이나 마리아 승천설
등은 모두 인정한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교, 불교, 힌두
교, 유대교와도 연합을 추구한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실제로 죽은 영혼들
을 불러내는 초혼제를 열어 이를 성령의 강림으로 표현한 경험이 있지 않는
가. 그들은 궁극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이방종교마저도 하나가 되는 것을 진
정한 영성으로 생각한다.
이는 성경 계시의 완결성과 만족성(딤후 3:16,17)을 부인한 까닭이며, 주께
서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엄히 경고하는 사실을 경
멸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처럼 성경의 완결된 계시를 부인
하면 엘리야의 세미한 음성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우리도 해야 한
다고 주장하게 된다. 관상 옹호론자들은 관상(관조)를 함으로써 주의 음성
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신사도 운동 같은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교회들이 신사도 운동이 생겨
나는 것도 그릇된 로마 카톨릭적 계시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오히려 능력있는
목회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신학교에서는 신사도 운동하는 목사가 강의를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본
다.
3. 주문하듯 중언부언 반복하는 것이 기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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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은 로마 카톨릭과 이교의 혼합종교에서 온 것이지 성경의 말씀을 기반으
로 하는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관상 옹호론자들은 짧은 기
도문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 신․인 연합의 경험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음
성을 듣겠다고 한다. 성경에서의 연합은 관상옹호론자들의 신․인 합일을 의
미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요한복음 17장 11, 22, 23절에서 “하나 된다”라고 할 때, 그러
한 연합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이미 존재해 오고 있는 연합이 계
속 보존되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신․인합일이 관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여기서 연합을 보전되게 하고 유지되게 하는 조건은
주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난후에 온 세상에 전파될 말씀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돌아와서 하나되게 하는 본질은 하나님의 메시지, 곧
말씀이다(요 17:16,17). 어느 시대든지 주님의 교회로 연합하게 하는 것은
주님을 통한 구원을 믿음으로 받고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되어 진다. 이 방
법 외에 다른 연합은 거짓된 연합이다. 말씀과 성령으로의 연합만이 참된 연
합이다.
성경에서 주님
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의 첫 기원이 무엇인가.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옳게 공경할 수
없는 전적 무능과 부적절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그
분의 말씀과 역사와 은혜들을 알고 높이 존경하며, 말과 행실에 있어서 무지
함, 우상숭배, 신성모독과 같은 것을 제거해 주실 것을 비는 것이다.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불안전할 수 밖에 없으나 구속 받은 우리는 그의 이
름을 거룩히 여겨야 할 의무가 있다. 관상(묵상)기도 행태는 이방 혼합종교
에서 온 심성종교이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은 아니다.
4. 무아지경의 묵상이 성경적 기도인가?
관상기도옹호자들 중에는 침묵의 기도를 최상의 기도로 언급한다. 침묵의 기
도 중에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다음은 리차드 포스터의 고백 중 일부이
다.
“하나님은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분을 초청하신다. 그 분의 집에 슬리퍼를
신고 들어간다. 식탁으로 초청하신다. 그 분이 베푼 잔치상(한국 음식도 차
려져 있음)으로 부르셔서…그리고 나서 거룩한 도서실로 인도하신다. 그리
고 우리를 침
실로 초대하신다…” 성경이 이러한 것을 가르친 적이 있는
가. 성경의 모든 사람들은 기도할 때 말씀과 동떨어진 것을 추구한 적이 없
다.
관상적 묵상(명상) 영성 운동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마태복
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시편 46편 10절에
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고 할 때 ‘가만히 있
어’라는 말씀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러한 의미가 아니
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무엇이든 사람이 고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배척해야 한다. 왜
냐하면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인간의 고안물은 자칫 우상숭배 및 신성모독
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관상적 묵상이
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고를 받은 신접자들의 명상이나 또 주술 같은 중얼
거림이 될 소지가 많다. 이교인 통일교에서도 자기들 나름대로 관상을 하는
데, 그 방식에 있어서는 오늘날 교회들이 하는 관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리차드 포스터 목사 자신도 이런 명상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나는 경고
하고자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
언으로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영
적 세계에 들어가는데 가끔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하
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다. 영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현상이 있는데 어떤 영
적인 현상은 분명히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위험성이 있음에도, 최근 관상(관조)은 소위 영성신학이라는 기치
아래 상당히 퍼지고 있다. “음성 듣기를 원하는 분, 자신의 사업과 가정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 자녀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 암병으로 고민하는 분, 하
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은 분을 초청한다”고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 듣
기 훈련에 참석했던 모 목사는 그 세미나에 참석한 후에 “먹통이던 목회자
가 예전에는 흑백으로 보았는데, 이제는 칼라 환상까지 보게 되었다”고 한
다.
과연 이들이 원하였던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자명하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인 육신의 문제요 자기 진로의 문제며 내일의 것을 먹고
입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들에게 아무리 그럴듯하게 성취되었
다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
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패역한 인생이 성령께서 기록한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앞날에 대해
서 뭔가 직접 알아보려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큰 교만이며 이는 하나
님을 무당화시키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혹 들었다면 오히려 미혹의 영의 역사일 가
능성이 다분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관상(관조) 운동을 하는 교회들과 로마 카톨릭, 불교,
힌두교, 통일교의 영성 운동이 그 방식에 있어서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다. 예를 들면 호흡기도(숨기도), 최면술, 짧은 기도의 반복, 침묵기도 등
이 대동소이하며 다르지 않다.
5. 예수님도 관상을 하셨는가?
2009년 9월 한국에서 열린 레노바레 컨퍼런스에서 J 목사의 ‘관상기도 강
론’에서 성경 이해에 다수 문제가 발견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예수께서 묵
상을 통해 그 만큼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즐기셨기에 권
위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바 아버지라 했다. 이것은 묵상의 신비한 영성이
다. 구약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그 사실을
여러분은 아는가? 예수께서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렸으
며, 하나님의 임재와 연합을 즐기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권위있는 아버지
정도가 아니라 아바 아버지라 한 것은 기독교의 신비한 연합이다”고 하였
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부터 아버지와 하나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
님과 사역에 있어서, 계시에 있어서,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 권세를 공유함
에 있어서, 생명을 공유함에 있어서, 미래적 부활에 있어서, 심판주로서 동
등이시다. 이를 구약이 증거하며, 성부 하나님께서 증언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셔서 성부께로 인도하
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도 관상을 하였다는 로
마 카톨릭처럼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미 영원부
터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데 굳이 묵상을 하여 ‘아바’라는 수준에 이를 필
요가 없다. 이것은 계시관은 물론 기독론과 신론까지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
면 예수님을 피조물화 시킨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추
신 예수님 자체가 성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은 이
후 즉시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구약에
는 없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것도 아니다. 요지는, 아바 아버지
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깊숙이에 아들의 영, 정신을 부어주심으
로 부르게 됐다는 의미이지, 우리의 훈련으로나 관상으로 되어졌다는 의미와
는 전혀 무관하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신, 즉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우리도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롬 8:15)고 한다. 아바 아버지라 부
르짖는 신분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며, 인간의 노력이나 관상적
묵상기도라는 새로운 영성의 경지를 통하여서 얻어지는 산물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부자의 관계를 가지셨다. 예레미야 3장 4절
에서 “네가 이제부터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
의 애호자시오니”라고 하였다. 19절에도 “너희는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
고 떠나지 말 것이니라”고 하였다. 시편 103편 13절에서도 “아비가 자식
을 불쌍히 여
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시지 않는가.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과 친밀한 부자의
관계를 허락하셨다.
오히려 구약에서 경고하는 것은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
냐”(말 1:6)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아버지라고 불러놓고 계율주의 형식주의
로 전락하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오늘날 “거룩한 아버지!, 신실한 아버
지!, 이렇게 짧은 기도를 통하여, 관상을 함으로써 마치 우월한 신자가 되
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풍성히 들어가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말씀에서 벗어난 이상한 신비주의의 극치요, 심리주의적 내지는 체면
적 자기 도취인 것이다.
짧은 기도문을 여러 번 반복하면 공로가 많아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
리는 로마 카톨릭에서 온 중세의 수사들의 관상에 참 영성이 있는 것처럼 미
혹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감성을 터치하는 뜨레스디아스, 안수하면 금니로 변
하고 금가루가 내리고 성령 안에서 안식하기 등의 알파운동, 지금도 사도와
선지자를 주장하고 성경외에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며 개인의 환상이나 체
험, 예언을 성경보다 중
시하며 이단처럼 직통계시를 보편화하여 교회 성장만
을 추구하려는 신사도 운동 등은 관상기도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그들은 개
혁주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거짓 교회, 거짓 이교일지라
도 인정을 해주면서 좋은 것을 공유하자는 혼합주의 형태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자기 만족, 공리적인 생각
으로 교회를 다니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생각으로 메시야를 기다
렸다가 결국 자기들이 기대했던 이상과 달랐을 때 저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
이소서라고 외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마치는 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궁구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그 분의 언약이 무
엇인지를 깨달아가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과연 나에게 그렇게 사랑하
시고 행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뉴에이지적 명상같은
혼합종교에서 처럼 자기 공로로 무엇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지식을 토대로 견고하게 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가지는 것이 기도이
다.
영
성신학의 대가이며 관상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강조한 토마스 머
튼 신부는 결국 종교 다원주의로 빠지지 않았는가. 그의 가르침이 지극히 성
경적이었다면, 그것이 성령의 역사였다면 왜 그렇게 되었겠는가.
관상기도가 유행하기 시작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이나 이
교적인 배경이 아니라 역사상 기독교회의 법으로 통과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영적 지도자로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 성경과 개혁주의 신조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