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좌| 개혁주의와 한국사회_조병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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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좌

개혁주의와 한국사회 

조병수 박사_합동신학대학원 교수

1. 서론 

사회는 개인으로 표출되는 인간을 표현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는 인간
의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개인과 사회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뿐 만 아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체적
으로 개인의 성향이 사회의 성향을 위한 전제이다. 때로는 어떤 지도자적인 
개인의 의견을 대중이 환영하게 되어 사회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
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도 개인과 사회의 결합구조를 부인할 수 없
다. 한국사회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가장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한국인
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한국사회의 성향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인의 성향은 무엇인가?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적지 않
게 많이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이런 긍정적인 모습은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
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인의 모습을 고찰할 때 한 눈에 보
기에도 한국사회에는 부정적인 의미에 있어서 개인의 성향이 극도에 달해 있
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국사회의 문제는 한국인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기형
성, 이탈성, 파멸성이라는 세 가지 부정적인 모습은 결국 한국사회에서도 자
명하게 드러난다. 기형성이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를 가리킨다면, 이탈성은 
탈선적인 문제를 가리키며, 파탄성은 해체적인 문제를 가리킨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모든 사회
에도 해당되는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2. 한국사회의 현상적 문제점 

사회의 현상적인 문제는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결국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여 종합할 수 있을 것이다. 

1) 종교적 측면 
한국사회의 종교적인 현상은 매우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간단하게 전
래 종교, 외래 종교, 신흥 종교로 분류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전래종교라는 것은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샤마니즘, 토테미즘, 애니미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자에는 한국사회에서 새로 생산된 신흥 종교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특
히 외래 종교의 수입물결이 강해지면서 신흥 종교의 발생은 더욱 빈번해졌
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한국사회의 신흥 종교들 가운데 고
유한 성격을 띄는 것은 거의 없고, 보통 전래 종교와 외래 종교의 변형이라
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현금에 전래 종교, 외래 종교, 신흥 종교로 축을 이루는 한국
사회의 종교세계는 기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각
각의 종교 현상은 다른 종교 현상들로부터 영향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에
게 고유한 본질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질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기복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의 세속화 또는 물질화에서 분
명하게 파악된다. 종교가 기형화되는 현상의 배후에는 과잉추구가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종교의 형태든지 본연의 성질에 만족하지 않고 
그 외의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 종교의 기형화의 동인이 된다는 것이
다. 
그런데 종교의 기형성은 그 자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큰 

제가 있다. 종교의 기형적인 형태는 반드시 종교의 탈선적인 행동을 불러일
으킨다. 종교의 탈선은 종교인의 육체와 정신 뿐 아니라, 윤리와 생활에 강
제력을 행사한다. 
종교인의 신체에 물리적인 행동을 가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며(예
를 들면, 나체 파티, 약물복용), 집단생활과 집단노동을 강요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결혼과 이혼을 강요하고, 사회생활을 금하며, 이탈자에 대하여는 
가혹한 보복을 시행한다. 이것이 종교의 과도한 행동이다. 이때 종교는 도
에 지나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탈
선적인 종교의 과도현상은 사회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종교의 탈선이 
사회에 부정적인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은 종교가 사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에 대하여 영혼과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종교
는 사회의 영혼이다. 그런데 종교의 탈선적인 현상은 결국 파멸적인 현상으
로 나아간다. 종교의 파멸성은 양면적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파멸성은 종파가 분열한다든가 집단자살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표현되
기도 하고, 둘째로 예
리한 종교비평가를 살인한다든가 자폭적인 방식으로 기
존 사회질서를 파괴하려 한다든가 이런 방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종교의 과잉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의 기형성과 이탈성과 파멸성
의 중심에는 과잉성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종교에 나타나
는 가장 큰 문제는 과잉성이다. 

2) 사회적 측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좁은 의미에서 있어서 순수한 사회적 측면이다. 사회
적 측면은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면 개인, 집단, 국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기형성, 이탈성, 파탄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① 기형성 
첫째, 개인에게 기형성의 대표적인 것은 변태적인 일상이다. 무엇보다도 변
태일상이란 개인에게 시간분배가 불량한 것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 개인
은 하루뿐 아니라 주, 월, 년에서 모두 불규칙한 생활을 한다. 한국사회에서
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일상의 시간 분배에서 실패한다. 
이런 불량성은 한 개인이 동시에 주간직업과 야간직업을 가짐으로써 가시화
되는 경우도 있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남편
과 아내의 시간사용 범위가 뒤바
뀌기도 한다. 직업여성에게는 맞벌이 부부의 문제로 가사에 임할 수 없고 자
기 아기를 돌볼 수 없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한국사회에는 회
식문화가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여성들은 낮 시간을 잃고, 남성들은 
밤 시간을 잃는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시간의 과잉소비를 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물로 
나타나는 것은 여가시간의 결핍으로 인하여 취미생활은 물론이고 작업시간
과 휴식시간까지도 부족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로 한국사회는 시간부족
현상 앞에서 무질서해지고 무책임해지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기형성은 과잉경제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과잉경제는 지나친 소유에 대한 의지에서 풀이된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대
체적으로 과잉소유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잉소유란 이미 현실생
활에 충분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그 이상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소유를 추구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 발견되는 과잉소유의 문제 중에 가장 악한 것은 빈곤 속의 과
잉이다. 말하자면 개인이 생활의 
한 부분에서는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으면
서, 생활의 다른 부분에서는 과도한 풍요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소급여자가 최신승용차를 구입하는 경우이다. 
결국 과잉소유 추구는 과잉소비를 낳는다. 한국사회에서 과잉소비는 오랫동
안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 가운데 하나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
주의나 복권당첨을 바라는 요행주의가 한국사회를 멍들게 하는 요인도 여기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나바다 운동(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
꿔 쓰고 다시 쓰기 운동)과 같은 건전한 시도는 거의 실효를 보지 못하는 경
우가 많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이제 대중들은 자신이 생산하는 것에 
의해서 동일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동일시되는 
존재로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금의 한국사회에서
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생산이 아니라 소비라는 것이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집단의 기형성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무엇
보다도 한국사회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병폐는 지역주의와 지역이기주의이
다. 지역주의는 소위 지방색이라고 
불리는데 한국사회에는 해방 후에 남북
의 갈등과 동서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역이기
주의는 지역주의에서 파생하는 것이지만 조금 더 규모가 작은 사회적 현상으
로서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특히 지방자치제가 도
입되면서 훨씬 더 강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 
지역주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연줄망과 연고주의이다. 연줄망과 연고주의
는 한국사회에 융단폭격 하는 듯한 피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한
국사회의 모든 분야와 영역에 이러한 악질적인 세균이 스며들어 있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연줄망과 연고주의는 학교의 출신과도 관계가 있
어서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에서도 집단의 기형성은 불평등의 문제에서도 완연하
게 나타난다. 불평등은 주로 두 가지 종류로 표현된다. 첫째로 구조적인 불
평등이다(구조불평등). 구조불평등은 사회적인 집단 내에서의 계급화에서 야
기된다. 또한 불평등에는 성적인 불평등이 있다. 성불평등은 남성과 여성 사
이에 일어나는 갈등으로서 성차별(억압)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사회적 집단의 기형성은 과잉시도이
다. 예를 들면 집단의 과잉시도는 다른 사업체들을 질식시키고 사업을 독식
하는 독과점화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대기업화에서 아주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인 과잉시도 외에도 사회의 과잉성은 교육과 예
술, 체육, 대중문화와 같은 분야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 중에서 대표적인 과잉교육이다. 예술
과 체육 그리고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과열현상도 한국사회가 소화하지 못
하는 커다란 문제점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② 이탈성 
위에서 기형적인 상태는 반드시 이탈성을 야기시킨다고 지적하였다. 개인의 
기형성에서 개인의 이탈성이 나온다. 개인이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는 현상은 무질서와 무책임에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이것은 시민의식이 결
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 개인들은 새치기와 끼어들기 또
는 그와 유사한 행동에 아주 익숙해 있다. 새치기와 끼어들기는 개인의 사회
적 이탈에서 대표적인 현상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표현되는 
양보불허와 대열파괴도 개
인의 사회적 이탈로서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무책임과 관련하는 불법적인 
쓰레기 처리, 폐수 방출, 폐자재 유기와 같은 처사들을 언급할 수 있다. 
개인의 기형성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양상은 중독이다. 이미 한
국사회에서 개인이 대중미디어(특히 TV)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
실이다. 이에 더 나아가서 영상녹화물(Video)에 대한 중독이라든가 최근에 
급증하고 있는 인터넷 중독은 개인의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이탈현상은 알코올 중독과 마약적인 약물복용이다. 물
론 이런 개인의 중독성의 배후에는 대체적으로 음란과 폭력에 대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이로부터 개인의 이탈은 범죄(사기, 절도, 강도)와 음행(매
춘, 간통, 강간)으로 발전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것들은 이미 청소년비행에
서 선취적으로 경험된다(소년비행. 왕따, 학원폭력). 
최근에 들어서 개인의 이탈은 성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의 이탈은 의상에 있어서 성통합적인(unisexual) 현상을 보이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모습에 있어서 성무별적인(asexual) 현상도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는 남성이 여성화되고, 여성이 남성화된다. 
성과 관련된 이탈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전환적인(transsexual) 시도이
다. 최근에 한국사회에서는 성전환(Transgender)이 공공연하게 정당화되고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집단의 이탈성은 해체와 이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가정에 관하여 말하자면 가족해체와 핵가족제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이기주의의 일면이다. 연고주의가 강해지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폐
쇄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구조불평등과 계급화에 대한 반작용은 노사분규이
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관계파괴라는 현대인의 현실적 상황에 근거를 두고 있
다. 집단의 이탈성에서 가장 큰 문제로는 농촌해체와 도시화를 들 수 있다. 
종래의 학군을 중심으로 하는 인구이동이나 신도시를 선호하는 인구이동과 
같은 현상들도 사실상은 집단의 이탈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③ 파탄성 
기형성과 이탈성은 결국 파멸성으로 인도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
형성과 이탈성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맞이하게 되는 파멸이란 피동적인 측면
에서는 육체질환, 정신질환(신경쇠
약, 우울증, 자폐증, 광란증, 자학증), 자
살로 나타나고 능동적인 측면에서는 착취, 폭력, 살인으로 나타난다. 집단
과 관련하여 파탄성은 가정분란(가출, 별거, 이혼), 소득분배불량과 빈곤, 
주택문제와 교통마비, 기업의 도산과 대중문화의 파괴성을 거론할 수 있다. 
국가의 문제는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국가의 기형성은 무엇보다도 이데올
로기화된 국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국가에서는 독재체제가 지배
하고 정보회로가 폐쇄되는 특성을 나타난다. 국가가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
하는 경우는 정당정치의 병폐, 주권당의 횡포, 정부의 국민의견 외면, 종교
적 민족주의, 우익강세, 무기거래(밀수출), 국제적인 폭력을 말할 수 있다. 
국가의 파산은 혁명에 의한 것이나 멸망을 제시할 수 있다. 

3) 환경적 측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하게 만든다. 인간에 의한 자연
의 기형화는 동식물에 다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더 크고 많은 생
산량을 위하여 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이나, 더 부드럽고 맛있는 살코
기를 얻기 위하여 동물을 인공적으로 사육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에 의
한 자연의 이탈은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건설하기 위한 산허물기, 
갯벌훼손, 댐건설, 고속도로 건설 등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이와 같은 자연
의 기형화와 훼손은 무서운 파멸을 결과시킨다. 홍수, 열대야, 생태계 교류
의 파괴, 환경호르몬의 악영향 같은 것들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파괴함으
로써 대기, 식수, 식품 등에 있어서 어려움에 처하고 말게 되었다. 

3. 한국사회의 내면적 문제점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내면적인 문제점은 쾌락주의(Hedonism)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쾌락을 얻는데 모든 감각기관을 사용할 수 있는 조
건이 넘치도록 충분하게 구비되어 있다. 쾌락주의에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
한다. 
첫째는 이기주의이고, 둘째는 편리주의이다. 이기주의는 쾌락을 추구하는 경
우에 반드시 동반되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
기 때문이다. 쾌락주의는 편리주의로 연결된다. 불편한 것에서는 쾌락을 얻
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기주의에서는 파관주의(破關主義)가 나오고, 편리주
의에서 물량주의가 나온다. 파관주의란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서 이기
r
주의의 극한표현이다. 파관주의는 자발소외와 타자파괴로 구체화된다. 
편리주의는 대형화를 목표로 삼는 물량주의에서 절정에 달한다(대형백화점, 
대형서점 등). 물량주의는 신속성(“좀더 빠르게”)과 편리성(“좀더 편하
게”)과 신선성(“좀더 새롭게”)을 실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데 결국 
한국사회의 내면적인 문제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일련의 현상들에서 항상 
작용하는 요소는 과잉성이다. 
쾌락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각작용을 과도하게 사용하려는 것
이다. 이기주의와 파관주의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말미암아 발생하
는 과잉현상이다. 편리주의와 물량주의는 쉽게 다량의 물건을 향유하려는 시
도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모든 면에는 과잉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만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과잉개인이며, 사회
가 아니라 과잉사회이고, 국가가 아니라 과잉국가이다. 한국사회에는 모든 
면에서 결핍과 빈곤이 해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모든 면에서 
과잉과 풍요가 행세를 하고 있다. 과잉성은 한국사회의 최악의 문제이며 최
대의 적수이다. 

4. 개혁주의의 사
회참여관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영역과 방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
다. 

1) 전 영역 참여 
첫째로 영역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개혁주의는 사회의 전 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개혁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는 사회가 서로 상관없
는 개인들의 조잡한 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 유기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적 유기체는 인류의 복잡한 생활에서 발생한 독특하면서도 서로 관계
된 많은 영역들로 구성되었는데, 각 영역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책무와 명령
이 있다. 여기에서 사회의 영역주권을 말하게 된다. 이 영역은 어떤 것이든
지 하나님이 주권을 주셨고, 또한 특별한 책무를 수행하라고 맡겼으므로 자
신의 영역 내에서 주권적인 권리를 가진다. 신자는 독특한 주권을 가지고 있
는 각 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문화적인 사명을 수행한다.
인간의 사회는 문명인과 야만인, 가치가 있는 사람과 가치가 없는 사람, 친
구와 원수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분리적 질서와 대립적인 
구조와 상반적 체계를 지니고 있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 긍정적으로 
참여하
기 위한 조건은 사람들을 그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보면 사회에 대한 긍정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시키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사회참여의 동인은 하나님에 의거한 인간접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조망
에 의존할 때에만 사회의 모든 영역을 편견없이 바라보며 변화시키기 위하
여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이기주의와 파관주의가 깨어진
다.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전 분야의 개혁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절정에 달한
다. 사회를 개혁한다는 말에는 사회의 두 가지 성격이 전제된다. 우선 긍정
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개혁의 이유는 사회가 피조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
며,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의 타락성 때문이다. 
사회는 하나님의 피조세계이지만 타락하여 부패해있기 때문에 그 본연의 성
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개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의 전 분
야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 그리
스도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
심으로만 가능하다. 사회의 모든 분야의 개혁은 어떤 인간적인 방식에 의하
여도 가능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내적인 충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2) 조절주의 
이에 더하여 방식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 중요한 것은 
조절주의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사회의 전 영역적인 병폐의 배
후에는 과잉성이 도사리고 있다. 과잉성이란 것은 조절의 실패를 의미한다. 
자기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 과잉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검소, 절약, 정직, 성실과 같은 미덕들을 실천한다. 사실상 조절
의 원리는 성경의 교훈이다. 사도 바울은 조절의 원리를 정확하게 가르친
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
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조절주의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를 설명
하는 단락에서 조절주의의 원인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첫째로 개혁주의가 추
구하는 조절주의는 사람을 위한 성격을 가진다. “누구든지 자
기의 유익을 
구하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이것은 인간적 조절주의이
다. 둘째로 개혁주의는 하나님을 위하여 조절주의를 추구한다. “그런즉 너
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전 10:31). 이것을 가리켜 신적 조절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신적 조절주의는 “모든 일과 인생의 모든 선택에서 오직 언제나 자신의 의
식에 임재하시며 언제나 그 눈으로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면밀
하고 기운찬 경의에 의해서 통제되는 구속받은 사람”에 의하여 모습을 드러
낸다. 이렇게 두 가지 원인에서 출발하는 조절주의에 의하여 개혁주의의 사
회참여관이 정당하게 형성되는 것이다. 

5. 결론 

개혁주의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면
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면이 훨씬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와 사회와 환경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살펴보았지만 이런 구도에 포착되지 않

는 부분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만큼 한국사회
의 병폐와 질환은 크고 깊은 것이다. 
개혁주의는 이러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격리되는 것도 개혁주의의 길이 아니며, 한국사회에 용
해되는 것도 개혁주의의 길이 아니다. 개혁주의는 한국사회를 개혁하기 위하
여 전 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며, 질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
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노력은 전 영역 참여관과 조절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참여하지만 동화되지 않는 것
이며,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극적 참여를 시도하
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와의 분리가 아니라 구별일 뿐이며, 사회에의 융화
가 아니라 참여일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므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인간
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사
회에 의하여 개인이 매도되거나, 개인에 의
하여 사회가 파괴되어서는 안 된
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점은 바로 이와 같은 양자의 현상이다. 개
인이 사회에 의하여 매장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거니와 사회가 개인에 의하여 
농락당하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사회를 존중하
지만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개인주의적 사회주의를 말할 뿐 아니라 개인
을 존중하지만 사회의 안정을 보호하려는 사회주의적 개인주의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개인에게 있는 타락
성이 사회에서 그대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개인과 사회를 모두 억
제하는데 관심을 가진다.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은 개인에게 나타나는 대
로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만일에 이것들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개인도 사회
도 모두 파산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는 개인억제와 
사회억제가 다같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억제는 다른 말로 하면 조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의 조절
성은 한국사회의 과잉성을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이렇게 할 때 
한국사회는 인간의 쾌락과 이익과 욕구를 추
구하는 인간적 인간의 사회에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며 의존하여 존재하는”(행 17:28) 신적 인간
의 사회로 변화되는 것이 개혁주의에 의하여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확고하
게 믿는다.